나는 남자에 미쳐보지 못했다. 사랑도, 일도.
여태껏 살면서 누군가에게 죽도록 몰입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늘 남자 아래서 닿지 못한 채, 그들의 인정이 나를 증명하는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껏 내 삶에 이 ‘사랑’과 ‘인정’의 개념은 자꾸 뒤섞여 헷갈려왔다. 사랑받지 못하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내게 인정과 애정은 늘 한 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백한다. 나는 인기가 없었다. 인기 있는 여자는 재수 없지만 인기 없는 여자는 조용히 사라진다. 이 사회에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하면 쉽게 투명해지기에 나는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볼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예전에 친구의 글방 수업 주제가 '스탠드업 코미디 대본 쓰기' 였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썰을 말해줬었다.
“맨날 밤마다 카톡 오고 굳이 우리 학교까지 와서 벚꽃 구경하겠다기에 날 좋아하는 줄 알았어. 만나서 놀다가, 내가 춥다고 하니까 주머니에 손 넣으래. 따뜻하더라 하하하”
정적이 흘렀다. 이내 친구들이 어~~~ 하면서 나를 가여이 여겼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웃으라고 얘들아. 이거 그냥 어쩌다 별로인 상황을 만난 거잖아! 나를 짠하게 보는 게 싫었다. '너라면 그런 대접받을만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차라리 깔깔깔 비웃어주었으면 했다. 남자가 차이면 개그가 되지만 여자가 차이면 비극이 된다. 게다가 뚱뚱한 여자가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다는 말은 아주 쉽게 애처로워 보인다.
사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한 노력은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연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나는 인정받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연인에게도 일터에서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구걸했다. ‘필요한 사람이 될 것’ 짝사랑하는 오빠의 독후감 과제 대신 써본 적 있으신지? 회식 자리에서 남자 상사의 안주를 챙기며 ‘센스 있는 후배’가 되려 애쓴 적은? 선배와 친한 여자애를 부러워한 적은? 나는 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편집을 잘하기 위해 밤 좀 새는 거 아무것도 아니지. 누가 내가 좋다고 하면 항상 의심했다. 나 예쁘지도 잘나지도 않은데 날 좋아한다고요? 스스로가 자격 미달 같았다.
대학생 때 만났던 어떤 남자는 횡단보도에서 나에게 번호를 따려고 했다. 나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서
"그… 이거 그거예요? 옥장판??"
“…네? 아니 저는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아… 피라미드? 같은 건가?"
그는 순간 다단계업자 취급을 받게 되어 허겁지겁 명함을 주었다. 대기업에 다닌다던 그 사람은 내가 의심을 놓지 못하니까 자기 회사 동료랑 셋이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매일 안부를 묻는 통화를 해왔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가 누구든 간에 '나 따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엄마가 서울에 잠시 일 때문에 올라왔다. 그와 사귄다고 그치만 나이도 9살이나 차이 나고 성에 안 찬다고 했을 때 엄마는 “그런 사람이라도 아니면 누가 너랑 결혼해 주겠냐”고 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나 자신을 엄마가 나를 보는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나의 가치를 헐값에 매기는 버릇은 어려서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이어졌던 짧은 연애에서 나는 상대방의 애정표현에 늘 목말랐고, 갈증에 허덕이다 제풀에 끝내기 일쑤였다.
20대 때 나는 연애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나는 혼자가 좋아!'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실은 둘이었던 적이 많이 없어서 긴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의 기저에는 내가 사랑의 피대상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외모와 성격을 갖고 있어서라고 깊이 인지하기도 했는데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늘 '너는 너무 쎄'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게 '너는 너무 연약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이 좋아하기엔 너무 뚱뚱하고 까맣다고 생각했기에 무리한 다이어트를 지속하기도 했고, 심지어 ‘페로몬 향수’ 같은 것도 사서 뿌려봤다. 참고로 그냥 향기로운 사람이 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는 마음속 깊은 곳부터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고 인정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다른 종류의 애정결핍에 놓이게 되었다. 나보다 실무 경험이 적고 기획 실력이 모자란 친구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빈번히 남자 선배들에게 인정받았다. 똑똑하고 성실한 여자들이 쌓은 공은 모두 남자들 차지였다. 우리가 힘들게 준비한 행사를 잘 마쳐놓으면 남자애가 어디 위원장이나 단체장 감투를 쓰더라. 무임승차한 거 지도 알면서 얌체같이 떡하니 앉아 있는 그 애들을 보면 억울했다. 몇 번이나 남자 선배들께 “선생님, 저 키워주세요. 저 일 잘하잖아요” 말도 해봤다. 허허 웃으며 그러마 하셨지만 돌아온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저 수발들 여자일 뿐이구나. 올라가고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 남성들만의 단결은 너무 견고하여 내가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내가 한동안 제일 미워했던 사람의 분류를 꼽자면 ‘남미새’다. 하루 종일 남친 타령하는 친구들은 20대 초반에 다 걸렀건만 일터에서 만나는 남미새는 막을 길이 없었다. 남자들에게 여자들끼리 한 얘기들 옮기고 자기가 무슨 중개자라도 되는 듯이 ‘개념녀’ 코스프레하질 않나, 여성 커뮤니티 내 정보를 공유하질 않나. 하, ,, 마초 꼰대 남성들보다 더 싫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자들의 인정받아보려는 모습이 기가 찼다. 니가 그런다고 걔네들이 널 그 사회에 껴줄 거 같니? 남성 연대가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시녀질한다고 욕했다. 여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여자뿐이라고! 남미새는 여성에게 해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나는 진짜 경계해야 할 기득권 대신 그 기득권에 잘 보이려 했던 여자들을 더 싫어했던 건 아니었나. 왜 그렇게 싫었냐면 나는 그렇게 안 하고 안 할 거니까. 아니 좀 구차해서. 아니 저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만든 별것도 아닌 거에 비집고 들어가려는 게 싫어서. 이 구조 속에서 여자는 어떤 위치에 있어도 ‘진정한 사랑과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남미새’도 ‘명예 남성’도 이 위계 속에서 손쉽게 원망할 대상이 된다.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미천한 우리들끼리 서로 밀어내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남자들의 사랑에도, 남자들이 정해둔 사회적 인정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걸 붙잡으려고 애썼던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찾으려 했던 것이었음을. 이길 수 없는 게임판 위에 말로 서있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애초에 누군가에게 나를 인정할 권리를 줘서는 안 됐다. 더 이상 그들이 나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결국 그들의 승인이 아니었다. 그저 나 스스로가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를 시험하며 살아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