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내가 만만히 갈만한 적당한 산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그 산을 마음속으로 ‘나의 산’이라고 명명 지었다. 나의 산은 내게 서울에서 자연에 닿아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지난주부터 나는 지난 한 달간 마감 불안으로 비롯된 폭식과 과수면의 고리를 끊기 위해 등산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늘 그렇듯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방구석에 누워 노트북 빈 화면을 바라보며 내 삶의 불행 시나리오를 집필하느라 바빠서 실행으로 옮기긴 어려웠다.
사시사철 초록을 유지하던 제주의 오름과는 다르게 서울의 겨울 산은 마른 가지와 얼음으로 뒤덮여있었다. 오랫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시나리오 쓰는 척’ 했던 나는 낮은 체력으로 금방 숨이 찼다. 헉헉헉헉. 주말 오후의 산길에는 내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늘어난 몸무게만큼 다리에 부하가 걸리고, 이마와 등허리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저 멀리 높은 곳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남아있었다. 나에게 이런 고생까지 살 만큼의 젊음과 자본이 충분히 있었던가 자문해 봤다. 없었다. 하지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라고 세상 많은 사람들이 충고했다. 나는 종종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버겁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를 한번 살리는 셈 치고 나와줬다.
오랜만의 등산은 힘들었다. 멀리 풍경을 볼 새도 없었다. 끝없는 계단에 심박수가 올라가고 시선은 발밑으로 향했다. 하지만 쉬면 영영 못 오를까 봐 천천히 가더라도 멈출 순 없었다. 숨을 연신 몰아쉴 때마다 겨울 찬 공기가 코끝에서부터 뱃속까지 퍼졌다. 무거운 걸음을 반복하길 마침내, 산 정상에 도착했다. 서울답지 않게 하늘이 맑아 저 멀리 남산까지 보였다. 호흡을 가라앉히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여기는 서대문 형무소고 저기는 여의도고. 산에 오르니 밑이 훤하게 보여서 오를 때는 안 보이던 산세도 그려보았다. 결국 꼭대기까지 왔구나. 집에서 SNS로 도망가거나 쉴 새 없이 음식을 욱여넣지 않길 잘했지. 근래에 했던 일 중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다. 봉수대 조각이 담긴 하늘을 찍으며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끝을 내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니 대부분의 일들이 그랬다.
어려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몰입했던 질문이 있다. 사람은, 그리고 나는 ‘왜 살아야 하지?’. 내 삶은 매년 나빠지기만 하고, 앞선 이를 따라잡기엔 이미 너무 멀리 뒤처져있는데 왜? 이미 끝나버린 경주에 왜 참여해야 하지?라는 물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건 ‘죽고 싶다’는 마음과는 명백히 다르기도 한데 그냥 어디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 감은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마음, 내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세상이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이 삶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면 버틴다는 게 소용이 있나 골몰했다. 나는 긴 시간 동안 생을 냉소와 비관으로 대했다. 나에게 삶이 중요하다는 증거를 줘. 어떤 책과 영화에도 답은 없었다.
나는 예전 일기를 보면서 ‘이때 무슨 일로 힘들었지?’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말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사로운 감정들은 금방 휘발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일들은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불쑥 튀어나왔다. 엄마의 딸로 살았던 일,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내 몸에 대한 감각, 외주 업자와 스태프로 일하면서 느꼈던 것 들을 쓸 때마다 나는 작은 해방을 맞았다. 생각이 흩어지지 않게 글자를 모아 한 편의 글을 마치는 것. 이 글쓰기 행위는 평소에도 계속 각기의 정상에 도달하도록 부추겼고 요즘은 글, 그리고 쓰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글쓰기가 무엇이길래 나의 하루를 온통 장악하는가. 지난 겨우내 써온 몇 편의 에세이를 찬찬히, 여러 번 다시 읽어봤다. 그리고 나의 글은 어쩌면 나의 생존기라는 생각을 했다. 나를 피해자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 발버둥 친 내역서였다. 억울한 일이 있었어. 그래도 나는 벗어나려고 기를 썼어. 상처받은 일이 있었어. 많이 울기도 했지. 그래도 나아갔어. 스스로가 너무 작게 느껴져. 그래도 주변에 기대며 견뎌봤어. 이 ‘산다’는 감각은 참 신기하다. 익숙지도 않게 매번 나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한다. 오늘도 나는 산 오르기에 힘에 부쳤고, 어쨌든 집을 나왔다는 것이 반가웠다. 아, 나는 너무 살아있구나.
나는 인생의 어떤 요령도 몰랐으므로 모든 시간을 살아내면서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속절없이 깨지고 다시 굳혀갔다. 여태 삶의 의미가 뭔지 알아내진 못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다. 다만 나에게 다양한 경험을 셀프 제공하며 ‘살아있다’는 것을 그저 느낄 뿐이다. 사람들에게 데여도 다시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즉흥춤 레슨을 가서 팔을 꼬고 다리를 휘저으며 내 몸이 만들어 내는 선에 한껏 고취된다. 친구와 함께 간 바닷가 캠핑에서 밤새 바들바들 떨며 잠을 설치다가도 아침 바다 너머 떠오르는 새로운 해에 감격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블로그에 올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쓰며 드디어 지난 시간들을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경험들이 나를 조금씩 더 살아있게 한다. 삶에 아직 기대할 뭔가가 있다고 믿게 한다. 나는 언제고 수월하게 사는 사람들을 잔뜩 부러워하면서 그리고 끝끝내 모든 삶은 공평하게도 나름의 고통과 환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우쳐갈 예정이다. 어릴 적엔 이 나이쯤 되면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한 해 한 해 걸음을 옮겨가며 나아간다.
한 주가 지난 뒤 다시 찾은 산은 그대로인 듯 많이 변해있었다. 등산로 양옆에는 개나리 초록 가지들이 삐쭉삐쭉 올라왔고, 지난주에는 꽝꽝 얼었던 얼음들이 그새 풀려 개울물로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봄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전히 패딩을 입을 만큼 찬 공기이지만 햇살은 훨씬 보드라워졌다. 몸을 움직이며 손끝과 발끝에 온기가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계단 한 계단씩 오르는데 왠지 이게 삶의 비유 같았다. 어쨌든 끝을 봐야 끝이 나는 것. 끝까지 살아봐야 뭐든 알 수 있다는 것. 중년 남성들이나 이런 등산 에세이 쓰는가 했더니 나 조금 아저씨가 된 걸까? 모든 것엔 끝이 있다는 걸 아니까 긴 계단도 오를만했다. 이것도 전부 한때거든.
겨울나무는 가지만 앙상했지만 그 대신 뒤에 있는 나무들도 볼 수 있어 좋다. 겨울엔 누구든 조금씩 뽐내기를 멈추고 뒤에 오는 것들도 기다려준다. 아 이래서 겨울 산도 좋구나. 덕분에 나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곧 이 산에는 새싹과 새잎이 다음 계절을 준비하겠지. 무성하고 푸르를 봄 역시 기다려진다. 나도 봄엔 좀 더 기운을 차리고 씩씩하게 산행을 이어가야지.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은 내 삶에 적절할 때 알맞게 찾아왔다. 어떤 괴로움도 다른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된다. 길고 긴 겨울이 곧 끝나간다. 인간이 시간을 붙잡으려 해도 시절은 변하고 우리는 어쨌든 그 순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게 마음 가득 벅차고 홀가분했다. 봄도 그리고 다음 계절도 그 후의 여러 날들도, 내가 쓰고 걸어갈 나날들이 조금 기대된다.
아, 기다릴 것이 있다는 건 참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