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마 Feb 05. 2023

뿌리와 날개

아이는 어디에 뿌리 내리는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두 가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뿌리와 날개다.
Zwei Dinge sollen Kinder von ihren Eltern bekommen:
Wurzeln und Flügel.

괴테



식물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자라난다. 만물의 에너지원인 태양빛과 터전인 땅의 기운으로 생명을 틔워내는 지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식물은,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그 자체로 생육하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위대한 존재다.

날개는 특정 생물군에게만 있다. 땅에서 가장 멀어져 하늘에 가닿을 수 있게 하는 기관이 날개다. 지구상의 그 어떤 생물보다도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몸을 공중으로 띄운다. 다른 개체와 달리 물리적으로 가기 어려운 곳으로도 지형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날개. 중력을 뛰어넘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날개는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괴테는 부모가 아이에게 주어야할 중요한 두 가지를 뿌리와 날개라 했다. 세상에 발딛고 원초적인 양분을 자원 삼아 살아가는 힘이 되는 뿌리,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펼쳐내게 하는 날개. 참으로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어 역시 대문호는 다르구나 감탄하게 된다.


뿌리는 땅의 힘을 빨아올린다.


대지는 그 자체로 어머니를 나타낸다. 품어주고 담아주는 넉넉한 품, 죽은 것이 돌아가 분해되고 양분이 되어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 재생의 장이자 부활의 동굴이며 탄생의 자궁이다.


뿌리를 받은 아이는 든든한 기댈 곳이 있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을 품어낼 줄 앎으로써 타인과 세상 또한 품을 수 있다. 역경이 있어도 제자리도 돌아오는 소위 회복탄력성이 있으며 힘들 때 자체적으로 사용할 자원이 풍부하고 외부의 자원 또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모든 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고군분투하며 갖기를 바라는 힘이다.


그 뿌리를 만들어내도록 땅이 되어주려면 땅처럼 무한하고 지혜로운 사랑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이를 길러내는 어른부터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수용하는 사랑을 알아야한다. 땅의 속성 자체가 수용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빠진 뿌리 만들기는 공허하다.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도 아닌데 매니저가 되어 성공시키려고 애쓰는 모든 관리 행위는 안타깝게도 뿌리와 무관하다. 이는 되려 어른의 두려움, 뿌리의 부재로 인해 화학 비료를 뿌려대는 일과 같을지도 모른다. 나 포함 한국 부모들은 과도한 교육열이 증명해주는 바대로 자식사랑을 넘어서 집착이 대단한데, 언뜻 뿌리를 잘 만들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비료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은 듯 하다.

무엇이 뿌리일까? 정서적인 안정도 뿌리이지만, '우리 집'하면 떠올리는 정신적인 분위기, 문화가 뿌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흙은 보드랍고 촉촉하고, 어떤 흙은 검고 어떤 흙은 붉다. 흙의 색과 냄새는 저마다 다르고 그 환경에서 다채로운 식물이 자라나듯이 우리네 가정의 색과 냄새에 해당하는 분위기와 문화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정신적인 유산이라고 해도 좋겠다.

뿌리는 <살아있는 땅>에서 가장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살아있는 땅에서는 미생물과 곤충 등 작은 생물들, 지렁이, 균류와 각종 무기물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식물에게 최적의 영양분을 공급한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놀라운 작용을 한다. 근균(뿌리에 붙은 균류)은 식물이 서로 소통하여 면역기능을 올리도록 돕는다.

뿌리와 땅의 미생물은 놀라운 소통 기능을 갖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그냥 멀뚱히 땅에 빨대 꽂고 사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변과 소통하고 이타적으로 움직인다.


땅의 역할을 하는 부모는 화합해야 한다. 살다보면 쉽지 않지만 부부간의 화목은 가장 기초적인 단위의 소통 모델이 된다. 뿌리 유익균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부부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땅이 건강하고 아이가 기꺼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굵고 튼튼한 뿌리는 돈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다. 먹거리는 그 자체로 양분이다. 요즘 내가 반성하는 부분이 여기 다 있다. 입이 쓰지만 어쩔 수 없다. 정신 차리고 나부터 내 흙과 뿌리를 돌보는 수 밖에 없다. 자기를 돌보는 행위는 내 뿌리와 흙을 정비하는 일이니 여기부터 시작한다.


나의 뿌리를 키워낸 내 흙을 떠올린다. 부모님, 내 어릴 적 집의 분위기와 정신적 유산을 생각하고 돌아본다. 부모님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나 싶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씁쓸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엄마가 지나가듯 들려준 외할머니의 이야기인데 영혼을 건드렸는지 아직 영향을 준다.


외할머니는 종가집 큰며느리였고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하인이 있는 큰 집의 안주인이다보니 챙길 것이 많았다. 마당에는 아이가 들어갈 수도 있을만큼 커드란 쌀독 항아리가 둘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항아리에 쌀을 가득 채워놓고 언제나 한 항아리의 쌀에는 손바닥을 눌러 찍어 손자욱을 남겼다. 그리고 하인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손바닥이 찍힌 쌀독의 쌀은 늘 채워두고 표시해둘 터이니 언제든 필요하면 쌀을 가져가라. 집에 먹을 것이 없거든 와서 가져가고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라.'고 하셨단다.


나는 그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집은 어디에 기부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돈을 번 이후부터 기부를 했고 월급이 오르면 기부액을 늘렸다. 지금도 기부를 하고 있고 아이와 크리스마스에 같이 연탄을 보낸다거나 하며 지나가듯 나눔을 이야기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내가 가진 뿌리 한 줄기가 외할머니의 정신을 사랑하여 거기로 뻗어나가 나를 이룬 셈이다. 외할머니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뿌리는 사랑을 향해 움직인다.


나는 아이가 뿌리 내리고 싶은 사람일까? 뭘 해야한다,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식의 협박조의 회유를 흘리며 사랑보다는 두려움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고 있진 않은가? 나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게 되는 일로 채워야 나도 행복하고 아이들의 뿌리도 건강해진다. 내 뿌리도 사랑을 향해 내렸음에도 아이 키울 때는 두려움을 앞세우는 순간이 많았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 속에서 만난 외할머니가 나를 깨워주시려나보다.


나는 이런 것이 뿌리를 자극하는 면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무언가, 문화, 사랑에 뿌리가 움직이고 자리 잡는다. 말로 알려주는 것보다 인상을 남기는 것, 어디 체험 다니면서 마음은 딴데 두고 대충 보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정신을 만나면서 영혼을 건드리는 경험, 이런 일들을 통해 뿌리를 키워내지 않을까.

그 일이 꼭 도덕적으로 옳거나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네 영혼의 본질적인 속성은 사랑이기에 아무래도 사랑이 담긴 이타적인 행위, 순수하게 즐겁고 몰입하게 되는 행위가 마음을 울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도 세상의 물질적, 정신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영혼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해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소 이상적인 소리기도 하다. 아름답지 않아도 뿌리는 자라며 생채기를 입어도 뿌리는 또 자라고 나름의 방식으로 단단해진다. 어떻게든 우리는 자라고 변화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식물이 해를 향해, 땅 속을 향해 잎과 뿌리를 뻗어내는 것처럼 인간도 빛과 사랑을 향해 움직이고 싶어한다.


뿌리는 정신적인 소속감을 느낄 때 발달한다. 뿌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에 아이는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려 하고 애정을 얻는다고 느끼면 일단 나쁜 양분에라도 뿌리를 박고 본다. 사랑이 부재한 행위에 반발하는 힘을 가진 아이에게 되려 고마워해야하는데 대개는 말 안 듣는다고 걱정한다. 아이의 본성이 살아있으면 나쁜 양분을 알아보고 항의하기 마련인데 어른이 자기 편하자고 우겨넣는다. 내 얘기다. 반성한다. 옆으로 샜지만 나쁜 양분이라도 살기 위해 뿌리를 내려 자라다보면 사랑받기 위해 남의 시선에 맞추고 자기다움을 잃거나 불안에 의해 움직이는 어른으로 자라기 쉽다. 사랑을 못 받을까봐 영혼이 거부해도 특정 행위를 해오는 패턴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자기다운 삶을 찾아가는 일에 진통이 많이 따른다. 내가 이렇게 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은 실패했을 때 감싸줄 곳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온다. 뿌리가 빈약하면 날개를 펼치기가 힘들다. 이것도 내 얘기일세. 아무튼 나는 아이에게 푹신한 토양이 되고 싶다.


반면 날개는 자기다움을 향해 날아가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날갯죽지에서 날개를 돋워내려면 어릴 때부터 자율성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하고 자기가 선택하여 경험하고 이에 대해 평가하고 이후 방향을 재설정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자유롭게 노는 일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된다. 날개는 자유로운 시간에 돋아난다. 혼자 있는 시간, 심심하게 있다가 뭔가 탁 떠올라 그 놀이를 하는 선택의 시간에 그 싹이 자란다. 놀잇감이 제한적일 때, 자연과 야외에 있을 때 그 자유는 더 커진다.

 

어쩌면 아주 훌륭한 양육 환경, 화목하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가정, 자연주의 교육 환경 등이 뿌리와 날개를 주는 일처럼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뭔가 잘하고 많이 해줘야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식물 자체의 생명력이 놀랍듯이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놀라운 존재라서 그렇다. 되려 뭘 많이 하기 보다는 어른 자신의 뿌리를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좋은 토양을 만들면 된다. 작을지언정 날개가 있으니 좋은 토양으로 가서 친절하고 착한 미생물과 곤충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건강한 흙을 공급하는 돌봄 행위를 함으로써 그 과정에 아이가 자연스레 뿌리를 내리게 도울 수 있다.


뿌리 내리는 식물처럼 땅이 중요하면서도 날개 가진 동물처럼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가장 놀랍고 멋진 점이 아닐까 한다. 비루한 땅에서 자랐더라도 비옥한 땅으로 얼마든지 옮겨 새로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유연한 존재가 인간이다. 물리적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마음을 달리 먹어 심리적 환경을 바꿔낼 수 있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마음은 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날개가 되기도 한다.


내 뿌리가 건강하면 절로 생명력이 넘치고 사랑이 샘솟아 아이는 알아서 뿌리를 내린다. 뭘 해주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아닌 나 자신에게 할 일이다. 나는 이제서야 이 비밀 아닌 비밀을 알았다. 아이는 뒤로 미루고 내 일만 하라는게 아니다.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지 않으면 나쁜 토양이 된다. 요는 나를 사랑하란 것이지 나만 사랑하라는게 아니다. 나만 사랑하는걸 자기사랑으로 착각하고 편하게 받아들일 위험이 있어 함부로 사용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분별력이 없으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데에 사용한다. 개념이 값싸게 소비되는 시대라 더욱 조심해야한다. 하나하나를 깊이 이해하자면 인문학적 사유가 동원되어도 모자란데 피상적으로 편하게 갖다 쓰니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자기사랑은 요가나 차 한 잔, 꽃잎 띄운 목욕물 등이 아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달리느라 주변을 안 볼 때 오는 자아도취적 만족감은 더더욱 아니다. 내 기쁨만을 좇는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괴로움도 기꺼이 양분 삼을 수 있을만큼의 힘을 요구한다. 나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느리더라도 제대로 밟아나가고 싶다.



올해는 나와 아이, 가능하다면 남편까지도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좋은 흙을 가진 이들을 만나는 일,  뿌리가 있는 공간에 가는 일로 주말 여행을 채우려고 한다.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곱살의 크리스마스 판타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