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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상쓰기 - 희미해지는 풍경을 써라

by 율마

글쓰기 연습 중에 괜찮은 방법 중 하나는, 툭 던져진 소재를 갖고 생각나는대로, 손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써내려가는 것이라 한다.


한 때 했던 것을 올려본다. 주제는 <희미해지는 풍경>이었다. 의식의 흐름보다도 더 원초적인, 손이 가는대로 의식이 따라가는 것 같은, 뭔가가 그려질 때 나는 그저 대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감각들이 좋다. 몰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사는 것이 바빠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감각을 살리고 싶어 다시 적는다.




희미해지는 풍경


창문 너머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는 유난히 삐죽 튀어나와 보이는 큰 나무 하나가 있었다. 저 녀석은 저렇게 튀어서는 잘도 버티네, 우리는 늘 그 나무를 보며 묘한 위안을 받았다. 남들과 달라 튀어 보이지만 괜찮다고, 그녀는 시각장애인이고 나는 맹인안내견처럼 늘 붙어다니는 초라하고 파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우리는 그 나무를 사랑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해 산을 열심히도 묘사했다. 불쑥 튀어나온 나무가 얼마나 고고하고 씩씩한 자태로 서있는지를 설명할 때엔 말하는 나의 어깨도 으쓱해지고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더랬다. 바로 그 나무가 이제는 흐릿해지면서 산의 실루엣이 뭉뚱그려져 보이기 시작했다. 초록빛은 점점 탁해져 색을 잃어갔다. 구름 가득하던 하늘도 뿌연 옥빛 페인트처럼 뭉그러져 보였다.


"우리 나무가 잘 안 보여."



그녀는 울고 있었다. 울지마,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점점 흐려지고 있어. 내 말에 그녀는 소리내어 흐느꼈다. 괜찮잖아, 한 쪽 눈일 뿐인걸. 나는 일부러 흐려지는 눈만 뜨고 괜찮은 쪽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이렇게 희미해지는구나. 경계를 나누는 선이 사라진다. 선이라 여겼던 것들 주변으로 색이 번진다. 물에 젖어 망가진 수채화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세상이 점점 선과 모양과 색의 세계에서 빛바랜 색덩어리처럼 희미해진다. 그러다가 색조차 비슷한 무채색으로 탁해지고 어두워져서 점점 명암을 분간할 수 없을만큼 흐려져간다. 그렇게 나는 한 눈의 시력을 잃었다.



너는 여지껏 이런 세상에서 살았구나.



나는 목이 메여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낀다. 내 한 눈을 잃더라도 네 한쪽 눈에 다시 빛과 색과 선, 모양을 되찾아줄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내가 처음 그 선택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커드랗게 떠진 눈이 보이지도 않는 나를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허옇게 흐려진 네 눈동자는 애처롭게 흔들렸고, 눈보다 더 유능하게 세상과 그녀를 연결해주던 양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울었다. 빛을 잃은 그녀를 대신해 어둠에 잠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나의 시력을 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빛을 잃고, 너는 얻을 것이다. 네 눈은 다시 까맣게 빛날 것이다.



"안돼, 나는 이대로 괜찮아. 싫어. 네가 대신하는거 싫어!"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도 내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했다. 나를 아끼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더욱 너에게 빛을 찾아주고 싶다.



안구를 이식하는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는 것도 아니었다. 기이한 옷을 입고 나타난 기이한 사내는 아무런 고통없이 그녀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대신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이 그 삶을 짊어져 시력을 잃기만 하면 된다고. 세상에는 물리법칙을 포함하는 더 큰 등가교환의 법칙이 있다고 했다.



누가 대신하기만 하면, 이 세상 장님인 눈알수는 유지되거든. 하하. 내가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야.



사내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고, 안과 수술은 커녕 제대로 된 안약조차 살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기만 한다면 나는 괜찮았다. 그렇다고 내가 두 눈을 다 잃어야 한다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녀의 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영리하게도, 사내는 한쪽 눈만 주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내 한 눈이 멀면서 그녀의 한 눈이 보이게 된다니 우리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비익조처럼 둘이서 한 명의 눈을 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나는 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미소지었다. 우리 둘 다 서로를 볼 수 있잖아. 아무리 애써도 암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 아무리 소리를 내고 피부를 만져도 너에게 내 오만가지 감정이 담긴 얼굴을 보여줄 수 없는 것보다 백 배는 나아.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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