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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Mar 16. 2017

필요가 문제를 만든다

내가 겪는 문제는 내가 선택한 해결책


<미움 받을 용기>라는,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관점에서 썰을 푼 일본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이다. 제목에서 말하듯,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려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등감을 일종의 개인발전의 원동력으로 본 아들러답게, 지금 여기에 놓인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과거에 얽매여 결정론적 세계관 속에서 상처놀음하지 말고 자신의 현재를 기반으로 삶을 만들어가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들러의 관점을 책 속 화자인 철학자의 입을 통해 설명하고 주장하며, 또 다른 화자이자 독자의 맘 속 의구심을 다소 공격적으로 대변하는 청년이 준비된 FAQ를 중간중간 껴넣는 형식이다. 청년이 좀 오버하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청년을 다루는 철학자의 노련함을 통해 '부정적이고 시니컬한데 머리는 좋아서 따박따박 대꾸하는 한 대 때리고픈 젊은이를 대하는 법'도 살짝 익힐 수 있다.(농담입니다)

책을 읽었을 당시 나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고, 또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내 상처나 불행 등은 스스로 선택해서 지어낸 것이라는 통찰에 대한 내용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내 현재의 불행이나 고민, 문제, 상처 등등이 내 선택에 의해 생긴거라니. 시크릿이나 자기긍정류의, 신흥종교같은 소리하는거야? 내 과거의 상처나 현재의 문제는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책 속 청년이 대변하는 내 안의 한 면이 거부감을 드러냈다.

상처중독에 대한 글(https://brunch.co.kr/@ahala/7)과도 연관되는데, 상처에 빠져있는 것이 실제로는 무의미하니, 이를 깨닫고 밖으로 나와야 변화를 맞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상처에 '왜 계속 빠져있으려는지'를, 아들러의 관점을 통해 알게 된 것 같다.

요컨대, "필요가 문제를 만든다"는게다.

내가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는, '이미 지난 일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 선택지에 따라 과거의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가, 왜 가슴단으로 내려오면 턱 막혀 또 같은 패턴에서 뺑뺑이를 도는지 궁금하고 답답한 적이 있다면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뇌신경의 시냅스가 등산로의 익숙하게 난 길로 촤라락 연결되는 신경학적 이유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대체 왜 나는 심리적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벗어나지 못하는게 아니라, 무의식 중에 벗어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문제상황 속에 있는 피해자가 아니라, 의지를 갖고 선택하는 주체자로 발돋움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끝이 두려워 시작을 못하는 패턴을 갖고 있다. 그는 매우 호된 사랑의 열병을 앓았고, 그 후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위축된다. 누굴 만나건 그가 전에 만나서 데였던 그 사람처럼 나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쉽게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타인에게도 공표한다. 하지만 머리로는 안다. 내가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새로우며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움직이고 변해야 이 위축된 관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런데 도저히 되지가 않는다. 그 사람의 상처가 그 정도로 깊고 지독해서, 이 상처를 보듬을만한 누군가가 나타나야 해결되는걸까?

아들러는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그 상처를 계속 안고 있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당신이 더 안전하고, 주변 사람들의 세심한 관심이나 애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저런 상처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그런 상처가 딱히 없는 다른이보다 그 사람을 대할 때 더 주의 깊어진다. 조심스럽기도 하고, 배려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소개시켜줄 때 그에게 보다 진실하고 성실할 것 같은 사람을 선별해주고자 한다. 그의 또 다른 상처 스토리를 더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에너지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의 경우겠다. 하지만 상처 스토리의 장본인에게도 중요한 인물들은 결국 가까운 이들이다.

결국 상처인물인 그는, 자신이 그 상처 스토리를 부여잡고 있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더' 받을 수 있게 된다.

나의 옛 경험을 이 관점으로 재생해보면 다음과 같다.

회사에서 어떤 힘든 상황이 있을 때, 이것을 더 과하게 보고 트라우마로 키워 간직하는 패턴이 있었다. 실제로 그럴만한 부분이 있긴하다. 마치 저 사례의 사람이 누군가에 데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좀 더 확장하여, 내 상황 전반에 대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나에게 '회사를 떠날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필요에 의해 좀 더 각색되고 포장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회사를 떠나지 말아야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이것을 외면하고 떠났을 때 맞이할 상황이 두려워, 나는 또 다른 문제를 끌어들여 키운다. 소위 말하는 현실은 이렇다-고 하는 당위성 문제다. 모든 것은 내 두려움과 불안을 덮기 위해 복잡하게 꼬아놓은 실타래와도 같다.

그렇게 보면, 내가 가진 상처니 문제니 하는 것들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들일 뿐이다. 단지 어리석어, 목이 마른데 바닷물을 들이키는 격이라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뿐 아니라, 거기에 염분과잉 섭취로 목이 더 마르게 되는 것처럼 더 괴로워질 수도 있고 말이다.

내가 가진 문제는 내가 찾은 최악의 해결책일 수도 있다. 이걸 깊이 들여다보고 깨닫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내 진짜 감정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파내려갈 자신이 없을때는 급진적이고 인위적인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전혀 안해본 일을 한다거나, 평소 내 성향과 반대되는 선택을 해본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는데, 불안을 이겨야 하기에 개인의 자아강도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나의 문제는 무엇이 필요해서 내가 잡고 있는걸까? 조금 어렵지만, 이런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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