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6.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장소마다 어울리는 계절이 있기 마련이다. 테헤란로의 계절은 여름이다. 거대한 빌딩 숲이 거대한 열섬을 만든다. 시끄러운 차소리와 매미 우는 소리만 들린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뜨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런 착각에 빠져서, 옆의 사람들과 지친 채로 신호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러면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듯이. 그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하도급업체에서 업무 관련 서류를 메일로 보냈으니 업무에 참고 바란다고 했다. 외근을 마치고 시간이 애매해서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고 퇴근하려던 중이었다. 신호등을 계속해서 노려보다가, 초록불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뒤로 돌아섰다.
퇴근 시간 10분 전에 사무실로 돌아온 나에게 왜 굳이 들어왔냐고 물어왔다. 회신해야 하는 메일이 있다는 대답에, 그냥 핸드폰으로 회신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물음이 다시 되돌아왔다. 속으로만 그렇네-하고 웃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서 손에 잡히는 아무 서류를 쥐고 부채질을 했다. 땀이 식을 때쯤 퇴근시간이 되어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부서에 혼자 남고서야 메일을 확인했다. 누락된 서류만 다시 확인해서 말해주면 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누락된 서류 리스트를 이메일로 보내준 뒤, 전화를 걸어 추가 필요 서류들을 보냈으니 업무에 참고 바란다고 간단히 통화를 마쳤다. 손에 잡혀서 꾸깃꾸깃해진 서류를 멍하니 노려봤다. 마치 계속 노려보면 깨끗하게 펴진다는 듯이.
다른 부서 후배가 그런 내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다들 퇴근하고 없는데, 대체 혼자서 뭐 하고 계시냐는 후배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겨진 종이가 펴지는 걸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저녁이나 사달라는 후배의 말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헤란로의 거대한 빌딩들 뒤에는 수많은 골목들이 있다. 빌딩의 그림자를 그늘 삼아 도망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시끄러운 식당 안의 소음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찌개 끓는 소리, 아무도 관심 없는 텔레비전의 야구 중계 소리. 그 소음 속에서 6천 원짜리 소주 한 잔으로 꾸깃꾸깃한 하루를 펼쳐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나의 꾸깃함은 얼마일까 오만한 생각을 했다. 6천 원은 아닐 것이다.
후배는 회사일이 재미가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늘어놓았다. 나도 모르겠으므로, 관심 있는 척이나 하기로 했다. 후배는 일을 하는 이유가 있었으면 했다. 그리곤 한참을 휘젓던 국자를 신경질적으로 탁 놓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여기서 닭볶음탕이나 먹는 것이라는 게 분하다고도 했다. 본인도 말하고 실수했다는 걸 알았는지 겸연쩍게 살짝 웃으며, 이미 마른 물수건으로 손을 계속해서 닦아냈다. 그런 후배에게 조금은 언짢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여름에는 가족들과 하와이에 간다고 했다. 여자친구와 이제 결혼을 하는데 어디에 집을 사면 되냐고 물어왔다.
하와이의 해변도 더울 것이다. 공기는 투명하고, 풍경은 선명할 것이다. 해먹에 누운 채로 칵테일을 마시며 가족들을 바라보는 후배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무래도 신혼집은 마포가 좋을 것이다. 전부터 알아보던 아파트를 알려줬다. 낡고 좁긴 하지만, 두 사람이 지내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후배의 꾸깃함을 펼쳐내는 것은 사람이었다. 조용해진 식당의 정적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테헤란로 어디쯤에서 후배를 택시에 태워서 보냈다. 나는 반대편으로 건너가기만 하면 된다. 지나치는 사람도 없는 늦은 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만 바라봤다. 시간은 멈추기도 하고,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몇 년후로 건너뛰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더 나은 자리였는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이었는지, 아니면 언젠가 마주칠 이름 모를 당신이었는지.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러면, 언젠가 나에게도 건너야 할 이유가 생길 것처럼.
다만 확실한 것은, 테헤란로의 계절은 여름이다. 낮에는 빌딩 숲이 거대한 열섬을 만들고, 시끄러운 차소리와 매미소리만 들린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되면, 빌딩 숲은 그늘을 드리우고 자그마한 틈이 생긴다. 여전히 시끄러운 차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 속에서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낮과 밤에서 변치 않는 것은, 모두가 무언가를 참고,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이다. 신호등은 여전히 빨간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