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동길을 걸었다. 일기예보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우산은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면. 나는 오래된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고, 그대로 맞을 참이었다. 반쯤은 비가 내렸으면 했다. 걷는 모든 거리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당신에게 서울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살겠다고 말했던 오래된 주택의 가격을 헤아렸다.
걷는 순간마다 기시감이 들었다.
몇 해전 나는 당신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자고 있던 당신을 한참이나 바라봤었다. 나는 당신과 우리뿐인 덕수궁을 걷고 싶었다. 그렇게 곤히 자고 있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주 어렸을 적 나를 떠올렸었다. 일요일 새벽부터 일어나서 놀아달라고 아빠와 형을 깨우던 6살의 나. 다만 그때와 다르게, 당신을 콕콕 찌르며 깨우지 않았다. 반쯤은 당신이 일어나지 않고, 곤히 잤으면 했으니까. 내가 가졌던, 가지고 있는, 가지게 될 모든 것들이 너의 아침잠들보다 가난하다고 믿었으니까.
그래.
이례적인 전염병으로 아무도 없던 명동 저녁이었다. 호텔 앞의 막창집에서 저녁을 먹고, 이렇게 사람이 없는 명동은 처음이야-하면서. 혹시나 계속 이렇게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이 망해버리는 거 아니야?- 하면서 걱정했었다.(오늘 보니 기우였지만)
그렇게 당신은 곤히 자고 있는. 이례적으로 사람이 없던 명동의 아침이었다. 덕수궁 옆에는 당신과 몇 번이나 갔었던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고, 반대편엔 우산을 받아 든 채 혼자 덕수궁에 들어갔다.
당신은 곤히 자고 있다. 오직 가만히 덕수궁의 호수를 바라보며, 당신을 콕콕 찔러볼 걸, 작은 후회를 했었다. 다만 여전히 우리인 채로 덕수궁은 비가 내렸다. 서울은 여전히 잠든 채로. 비 내린 흙냄새와 따뜻한 커피 향이 우산 밑에 고여 들어 퍼져나가지 않았다. 당신을 깨웠다면 당신도 퍼져나가지 않았을까? 어디 다녀왔냐는 당신의 물음에 그냥 여기 앞에-라고 답했다. 당신은 그때 내게 아직도 비가 오냐고 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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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비가 오더라.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었어. 너에게 미안할 정도로. 나는 항상 내가 고아였으면 했어. 몇 없는 친구마저 없었으면 했어. 몇 해전 데려온 고양이가 없었으면 했어. 진짜 죽으려고 했었어. 잠에 들지 못해서 칼로 손목을 찍고 싶었던 날들이 많았어. 차마 찍지 못해서 울었던 날들이 많았어. 찍지 못한 게 한심했거든.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못했어. 공황장애가 심했거든. 아직도 지하철을 잘 못다. 기억해?. 너랑 어디 놀러 가다가 너 버리고 지하철 밖으로 혼자 도망 나와서 구역질했잖아.
나는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리는데 버스를 타지 못했어. 사람이 무서웠어. 다 나를 욕하는 것 같고. 착란이 심해서 실제로 그렇다고 느꼈고. 갑자기 옆에 앉은 이름 모를 누군가가 품에 숨긴 칼로 날 찌를 것 같았어. 넌 살 가치가 없다고. 그러니까 죽으라고. 그래서 겨울이 싫었어. 그래서 언제나 걸어 다녔어. 머리를 벽에 박고 혀를 씹어서 피가 난 때가 많았어. 혀 씹는 버릇은 얼마 전에 다시 생겨서 다시 병원에 다녀. 아니, 내가 아프고. 피가 나면 기분이 좋았어. 내가 아프면, 다들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 가족도 몇 없는 친구도 몇 해전 데려온 고양이도 내가 아프면 좋아할 것 같았어. 그냥 미친 새끼 맞지?
그런 중에 모두가 나한테 그렇게 힘들면 그냥 죽으라고 했어. 심지어 우리 아버지는 우리 형한테 생명보험 다 들고 그냥 집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어. 그래서 부엌에 있던 칼로 손목 찌르려는데 엄마가 막았어.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무섭더라. 그게 부끄러웠어. 부끄럽더라. 살아있는 게.
그래서 버스에 뛰어들고 싶었고, 심지어 뛰어들었는데 브레이크를 잘 잡더라. 틱도 심했어. 혼잣말이 심했어. 착란도 심했어. 매일 밤마다 누가 날 칼로 찌르는 꿈을 매일 꿨어. 넌 살 가치가 없다고. 넌 죽어야 한다고.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을 때, 아쉬웠어. 꿈이었거든. 그렇게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온 세상이 죽어서.
나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과 겁이 많아 죽지 못하는 나. 그렇게 두부류만 남았을 때, 너를 만났어. 있잖아. 너에게 말을 걸고,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그거 지금에서도 욕심이라고 생각해. 죽어야 할 사람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고 싶어서 아등바등. 그렇게 너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던 거야. 살고 싶었어. 원래 살고 싶었는지, 아니면 너와 살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다만 너에게 빌었어. 너만큼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근데 있잖아. 겁이 많았어. 너에게서까지 버려지고 싶진 않았거든. 이런 것들을 다 말하기는 무서웠어. 네게 다 말했으면 너는 이해해 줬을까? 괜찮다고 나를 안아줬을까? 근데 난 아니라고 생각했어.
네가 날 좋아해 주고, 곁에 있었으면 했어. 정말로. 진심으로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했어. 너랑 결혼하고 싶냐고 물어봤지?. 나는 결혼을 하게 되면 너랑 할 거라고 했지. 아니. 나는 너에게도 죄책감이었어. 속였으니까. 그래서 계속 병신같이 했지 병신 같은 모습들 본래의 나약한 병신새끼를 보여주면서 너만은. 너만은. 제발. 너만은. 이래도 내 곁에 있어 줄래요? 이래도. 진짜 이래도 내 곁에 있어 줄래요? 어리광을 부렸어. 콕콕 찌르지는 못했어. 넌 내게 소중하니까. 근데 그냥 내 옆에 있었으면 했어.
난 지방에 계속 있었지. 나는 그 와중에 너에게로 가려고 계속했는데, 회사에서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 그게 겹쳤나 봐. 이런 마음들과 상황들과. 난 내가 그냥 다 포기하고 대전에 오겠다고 말해주길 바랐나 봐. 병신새 끼지. 진짜로. 내가 뭐라고. 나는 그냥 자의식 과잉에 정신병자 새끼인데. 대전에 당분간 남기로 결정되었을 때, 너에게 전화해서 그만 헤어지자고 했어. 난 네가 그래 그냥 다른 말을 해주길 바랐나 봐. 6살짜리 애새끼처럼 콕콕 찌르면 달려와주길 바랐나 봐. 난 6살도 아닌데.
그 뒤로 결국엔 와서 너를 청계천에서 다시 만나서 걷고, 성신여대에서 우리가 먹었던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했던 것도 알아. 근데 그걸 다 설명하자면, 지금 여기까지 쓰는 것도 힘들어서, 너무 많이 울어서. 내가 누구랑 만나려고 해서 너랑 헤어지자고 했다고. 했던 네 말이 생각나. 화도 났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지금에는 해. 서운해. 근데 말을 못 하겠는 걸 이 주변의 모든 기시감 때문에. 어떤 길과, 어떤 것들과, 날씨와, 노래와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너니까.
생각해 보니까, 내가 태어나서 사랑한다고 말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너더라고. 사랑해. 지금도 사랑하냐고 물어본다면.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싶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후회만 남는다는 의미라면 지금도 그럴 거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있잖아 욘기야. 넌 나에게 그렇게 구원이었어. 그 수많은 사람 지나가던 홍대 거리를 참아낼 수 있게 해 준 네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 그 회색 도시 속에서. 네가 입은 그 핑크색 옷 때문이 아니라, 너라는 사람 그 자체로. 넌 색을 가졌어.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색으로. 그 이후로 7년간에 모든 순간 와 공간과 지금에서까지의 모든 기시감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내 부질스런 마음. 넌 필요 없겠지만, 다 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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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은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다만, 날씨는 조금 시원해져서 이번 주말에는 밖에 나가서 걸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정동길을 걸었다. 일기예보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다. 우산은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면, 나는 오래된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고, 그대로 맞을 참이었다. 반쯤은 비가 내렸으면 했다.
길의 중간쯤에서. 조금은 습기를 머금은 거리에 커피 향이 일렁였다. 그 아지랑이에 홀려서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서 당신을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느덧 기시감조차 흐려졌을 무렵, 다시 낡은 카페 문을 열고 정동길로 나왔다. 일기예보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할 것이다. 우산은 가지고 나가지 않을 테다. 비가 내린다면, 나는 오래된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고, 그대로 맞을 테다. 아마 반쯤은 비가 내렸으면 할 테다. 걷는 모든 거리에서 흐려진 기시감을 느낄 테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야, 몇 십 년 전에, 당신에게 서울에 다시 돌아오면 같이 살자고 말했던 오래된 주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일 테다. 나에서 당신이었다. 나에게 당신이다. 나에게 당신이었다. 나에게 당신일 테다. 아니, 나에게서 당신이다. 그래 분명히 나에게서 당신이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당신에게. 나에게서 당신에게.
나에게서 당신에게. 진심으로, 열 번이 아니라 백번은덧 붙인 진심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영원히 모를 테다.
네가 웃는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과 함께하지 못할 테니.
네가 날 기억 못 했으면 좋겠어.
나는 행복하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를 테다.
다만, 네가 그러했으면 좋겠어.
추신.
결혼 축하해.
李00 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