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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1. 2019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은정의 이야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피에로 메시나 감독 2016) 


*은정의 이야기 -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은정은 오늘 상영할 영화 제목을 보고 달달한 멜로드라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장면부터 분위기가 매우 이상했다. 특히 컴컴한 배경 위로 떠오르는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은 충격적일 만큼 비참했다. 비통함으로 도드라져 나온 잔 근육과 주름살들이 대낮 햇빛 아래 잔인하게 노출된 노파의 얼굴처럼 보였다. 너무 비참해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그냥 자리를 뜰 수는 없을 만큼 이미지가 끄는 힘이 너무 강했다. <당신을 기다리는 순간>은 이미지의 영화였다. 그리고 전달력은 너무나 강력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무표정이 된 안나(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이 익숙하다. 은정은 혼자서 영화를 보러 왔지만 마치 자신의 언니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언니의 아들은 대학교에 다닐 때 물놀이를 갔다가 사망했다. 친구들과 놀러 간 해변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하다가 급하게 바다로 들어간 것이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왜 급작스럽게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치 바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기라도 하듯 뛰어 들어갔다는 것이 친구들의 말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 뒤로 언니는 바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언니는 죽음의 신이 아들을 부른 거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언니는 약간 멍한 상태가 됐다. 언니의 영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곳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의 아들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언니는 계속 아들을 찾고 헤매는 것임에 분명하다. 은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영화에서 안나의 친지들은 감히 안나의 아들 주세페의 죽음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마치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오직 안나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주세페는 죽기 전에 부활절을 맞아 여자 친구인 잔을 집으로 초대했고 잔은 주세페가 그 사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주세페 대신 집사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것도 이상한데 주세페의 집까지 가는 길은 음산하기 짝이 없다. 백미러로 잔을 훔쳐보는 집사의 눈도 수상쩍기 그지없다. 아무것도 모르고 주변을 둘러보는 잔의 얼굴만이 맑고 투명하고 밝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마침내 도착한 주세페의 집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잔의 세계 속에는 주세페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잔은 죽음의 어둠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안나는 주세페의 핸드폰을 통해 잔이 남긴 메시지를 듣고 또 듣는다. 핸드폰 안에서 주세페는 아직 죽지 않은 채로였다. 잔이 그렇게 믿고서 주세페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아무도 주세페가 죽었다는 단어를 직접 내뱉지 않는다. 대신 ‘주세페는 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세페가 마음을 먹으면 올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마치 주세페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말 같다. 잔은 주세페의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세페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언제 오냐고 묻는다. 그 질문은 안나가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부활절을 앞둔 시점에 안나는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그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들을 언제 되살려주실 건가요?’라고.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심정으로 안나는 갈구 한다. 안나와 잔의 입장은 똑같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두 사람은 똑같이 간절하게 주세페를 기다리고 있다. 잔이 주세페의 핸드폰에 남긴 음성메시지는 안나가 주세페에게 하고 싶은 말 그대로다. 핸드폰에 담긴 잔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세페,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빨리 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차이점이라면 한 사람은 주세페가 이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안나는 잔을 만난 뒤에 아들이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깨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주세페를 기다리는 잔을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한다. 잔이 우연히 만나 집까지 데려온 청년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마치 파티에 온 것처럼 성장을 하고 과장된 웃음을 터뜨린다. 주세페가 살아 있다고 잔이 믿는 동안에는, 그리고 그런 잔이 옆에 있는 동안에는 아들의 영혼을 여기에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안나는 잔에게서 아들과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지금 아들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잔의 모습이 집사의 눈에는 기이하게만 보인다. 집사는 안나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사는 잔을 위해서 주세페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안나는 그런 집사의 의사를 무시한다. 안나의 행동을 나무라는 집사를 보는 안나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뭘 알아, 내 일에 상관하지 마.’ 그 누구도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은정 역시 언니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절대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안나는 은정의 언니가 그런 것처럼 온몸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은정의 언니는 아직도 가끔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마치 먼 외국에 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에 그 아이가 했던 행동이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들어주는 것이 은정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돼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은정은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그냥 세월을 흘려보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 아들과 만나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삶은 때로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생각만큼 긴 것은 결코 아니다.


  부활절을 하루 앞두고 안나는 아들이 집에 도착해 평상시처럼 냉장고 문을 꺼내 음료수를 꺼내고 목욕을 하는 환상에 빠진다. 안나는 환상 속의 아들에게 ‘왔구나, 부활절 축제 못 보나 했어.’라고 말하면서 부활절에 아들이 입을 옷을 준비한다. 환상 속 아들이 ‘엄마가 혼자인 게 걸려요.’라고 하자, 안나는 ‘그런 생각은 떠나기 전에 했어야지, 너무 보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이제는 다시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안나는 상상 속에서 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절 축제에서 혹시 아들의 영혼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군중 속을 헤맨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아들과의 만남이 부활절 축제라는 특별한 시공간 속에서라면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초점 없던 안나의 눈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바뀐다. 부활절 축제 전날, 잔이 우연히 만난 청년들을 데려와 함께 춤을 출 때 깔린 음악의 가사도 ‘기적이 오기를 바라며’이다. 안나가 바라는 기적이란 어떤 것일까. 희망이 없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은정의 언니가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었던 날이었다. 전화를 받던 은정의 언니는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더니 시간을 잃어버렸다. 조용히 전화를 끊더니 전화가 잘못 걸린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언니의 기억은 아들이 군대 가기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조카는 이미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상태였는데 언니는 아들이 제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바다로 놀러 갔다는 사실도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은정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바다는 위험해서 안 되지. 군대 간 애가 무슨 바다로 놀러 간다고 그래’라고 했다. 은정은 더럭 겁이 났다.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되돌아올 거라고 했다. 뜬금없이 군대에 가 있는 아들 걱정을 하던 언니는 이틀쯤 지나자 차차 기억을 되찾았다. 현실로 돌아오자, 언니는 눈가가 빨개지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지켜보는 것조차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언니를 붙들고 함께 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들이 군대에 있었을 당시로 되돌아가기를 얼마나 원했으면 비록 잠시였지만 언니의 기억이 그때로 되돌아가 있었을까.  

 

  영화에서 잔이 주세페가 어딘가 자신을 피해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은정의 언니도 아들이 돌아오진 못하더라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지 모른다고 은정은 생각했다. 영화에서 안나는 끝내 자신의 입으로 아들의 죽음을 선언하지 않는다. 아들은 그냥 돌아오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잔에게 아들이 스스로 잔을 떠난 것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잔은 절망하고 자신을 버린 주세페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집사가 주세페의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 잔의 방에 일부러 놓고 간 주세페의 핸드폰을 보자,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주세페의 핸드폰에는 잔이 그랬던 것처럼 안나가 아들을 간절하게 찾는 음성 메시지가 들어 있다. 하지만 잔 역시 주세페의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히 떠난다. 주세페의 죽음을 몰랐을 때 잔은 ‘주세페를 사랑해요. 주세페 없인 못 살아요.’라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랑을 찾아갈 것이고 언젠가는 주세페를 잊을 것이다.

  안나는 잔을 통해 아들인 주세페를 느끼고 싶어 했고 어느 한순간은 잔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잔이 남자 친구 어머니를 만나 긴장하듯이 자신도 남편을 만났을 때 같은 심정이었다고 말한다. 안나는 잔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붙들고 싶었지만 잔은 결국 떠날 사람이다. 잔은 안나의 집으로 데려온 청년과 춤을 춘다. 안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음악을 타며 매혹적인 춤을 추는 잔을 보면서 잔에게 필요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안나는 이제 그만 잔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남는 사람은 안나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엔딩 씬으로 홀로 남은 안나의 뒤통수를 보여주며 끝난다. 밤의 끝에 아침이 찾아오듯이 세상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안나의 삶도 계속될 것이다. 은정의 언니 삶도 그럴 것이다. 삶이란 남은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다. 은정의 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언니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 은정도 세례를 받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아들이 사고를 당한 뒤로 언니는 성당에 다니지 않고 있다. 언니에겐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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