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 재스민 Oct 25. 2019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

승민의 이야기- 자유라는 버거운 유혹

방랑자(아녜스 바르다 감독 1985)

*승민의 이야기 - 자유라는 버거운 유혹


 승민은 자신이 늘 뜬 구름을 잡는 것 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친정은 늘 가난했다. 승민은 공부를 곧잘 했지만 그렇다고 전교 1등을 빼놓지 않고 한다거나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상위권에서 맴도는 정도였다. 오빠는 승민보다 성적이 뛰어났고 게다가 장남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오빠만 대학을 보내겠노라고 선언했다. 승민은 그 말에 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뿐이었다. 승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집을 나와 버렸다. 집안일이나 도우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에 몰래 원서를 넣었고 합격을 했으나, 정신 나간 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승민은 자신이 부모에게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학에 붙으면 어떻게든 보내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 비참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자신의 인생 전부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뒷머리채를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승민은 어릴 때부터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기는 아이였다. 그렇지만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아이란 부모의 눈에는 골치덩어리일 뿐이었다.

  너댓살 쯤일까, 갑자기 사라져서 집안이 벌컥 뒤집혔는데 친척이 연락을 해와 엄마가 자신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엄마랑 딱 한번 가봤던 친척의 집을 어린아이가 걸어서 혼자 찾아갔던 것이다. 어린 아이가 가기에는 꽤 먼 거리여서 사람들을 놀래켰다. 자신이 미운털이 박힌 이유도 그런 데 있었다. 엉뚱한 짓거리를 솔솔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썽꾸러기였다.


  대학교에 가겠다고 우기는 자신을 바라 보는 부모의 경멸에 찬 눈빛을 보고 승민은 이제야말로 정말로 집을 떠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면서 오빠의 다음 학기 등록금으로 쓸 돈을 훔쳐가지고 나왔다. 어머니가 돈을 숨겨두는 곳을 승민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돈은 자신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떨리지도 않았다. 돈뭉치를 손에 넣는 순간, 오히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그 후로 고난의 삶은 시작됐다.      


  첫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승민의 고민은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밝게 웃는 여대생들 사이에서 승민은 마치 좀비가 된 느낌이었다. 늘 똑같은 옷, 초라한 운동화 차림에 끼니와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학우들의 고민과 승민의 고민은 천지차이였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해 이성교제에 열을 올리는 학우들의 고민은 사치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한 학기가 끝나고 승민은 휴학을 했다.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사는 것 자체가 너무 고달팠다. 숨 쉴 틈이 없어서 일단 한숨 돌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 뒤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성적 장학금은 꿈도 못 꿨고 근로장학생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겨우 학자금 보조를 받았다. 학교에서 하는 업무를 돕고 장학금을 받는 제도였다. 몇 번의 휴, 복학을 반복하느라, 동기들은 벌써 다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 학교를 다녔다. 미래는 깜깜했고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한 남자를 만났다. 기업체를 다니며 설문조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됐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만 승민과 나이 차이가 많은 것이 험이라면 험이었다.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승민은 이제 더 이상 돈 문제로 시달리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돈이라면 이제 진저리가 났다.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남편은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점이 승민과는 잘 맞았다. 남편은 원래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장남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대로 할 입장이 못 됐다. 승민 역시 힘든 대학시절을 보내게 해 준 것은 바로 소설이었다. 자신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주인공을 볼 때, 승민은 위안을 받았다. 여자 주인공에게 동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여자 주인공의 정서가 삶의 밑바닥에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수첩 한 구석에 써놓기도 했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도 더 고독하고, 나보다도 더 건조하고, 나보다도 더 앞날이 보이지 않는 그녀.’

 지금 그 수첩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남편을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승민은 척박한 자신의 땅에 이슬이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살며시 들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았다. 초기에는 달콤한 안정감이 승민의 몸과 마음을 녹여줬고 고됐던 삶이 언제였던가 싶게 가물가물해졌다. 남들처럼 영어학원에도 다니고, 브랜드 옷에, 명품 가방도 사봤다. 그런데도 삶은 점점 지루해져 갔다. 아이 학교의 엄마들과 만남은 즐겁지 않았다. 성적 얘기, 학원 얘기, 연예인 얘기다 다 였다. 사는 게 결국 이런 거였나 싶은 마음이 들 때, 본 영화가 <방랑자>였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박진감 있고 흥미진진한 영화는 아니었다. 화면은 매우 건조해 보였다. 주인공인 모나의 얼굴은 방랑자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맑고 깨끗했다. 모나의 복장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똑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먹먹해지는 느낌이 잠깐 스쳐갔다. 그것은 바로 승민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승민은 학교 선배가 준 바바리코트를 하나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래서 승민의 별명은 바바리맨이었다. 당장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몇 년에 걸쳐 3학년을 겨우 마치고 휴학 상태에서 결혼을 했다. 승민은 자신이 입었던 옷들부터 모두 의류수거함에 갖다가 버렸다. 그리고 새 옷을 구입하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자신의 낡은 껍데기를 버리면서 처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진저리 냈던 자신의 빈곤함에도 아주 작은 애정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 역시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방랑자>의 모나는 전혀 자신과 같지 않았다. 모나는 진정으로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누구에게 통제당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하지 않고 싶지 않을 때는 일을 안 해도 될 자유를 누리기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원하면 누구와도 잘 수 있고, 대마초를 즐기는 히피 같은 여자였다. 영화는 중간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서 주민들이 모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아녜스 바르다가 원래 다큐멘터리 감독이라서 이 영화도 그런 다큐의 느낌을 주고 있다. 모나를 봤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모나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나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만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모나가 그렇게 자유롭게,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영화가 끝났다면 비현실적으로 보이더라도 보기에는 즐거웠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나는 겨울에 동사한 채로 발견된다. 모나는 원래는 비서였지만 남에게 지시받는 삶을 살기 싫어서 방랑자의 삶을 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는 데는 돈이 필요했다. 숙소와 옷은 되는 대로 해결할 수 있다지만 먹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노숙 생활과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모나는 점점 쇠약해졌다. 지친 모나는 이제 안정된 삶을 원했다. 마침 과수원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뻐한다. 하지만 그 일도 성취되지 못한다. 과수원 일꾼들이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에 모나가 여자라는 이유로 함께 일하기를 거부했다.

  승민도 안다.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규범에 부딪히는 일이다. 힘 있는 사람들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문제도 힘없는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높은 벽처럼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안다. 승민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에 집을 뛰쳐나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두려웠지만 오기 하나로 버티었다. 그러나 방세가 없어서 주인에게 비굴한 자세로 궁한 말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었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자야 할 때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자신의 의지로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같은 과 친구들은 유복한 가정에서 편하게 학교 다니고, 고민하는 것이라고는 남자 친구와 갈등이나 학점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사회문제로 심각하게 투쟁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곧 시들해졌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변해있었다.

  승민은 현재의 자신의 그런 시스템 속에서 평온을 느끼며, 점점 둔해가는 생물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다. 결혼을 하면 돈 버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취미생활만 하리라 생각했고 스트레스 없는 삶을 꿈꿨지만 주부로서 삶도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남편이 노총각이었기 때문에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던 시부모도 결혼하고 보니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승민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또 그 지긋지긋한 자유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랑자>의 모나가 힘든 생활 속에서도 밝게 웃는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다. 실현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상마저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현재 승민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처럼 보이니까.         


이전 09화 스틸 앨리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