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 재스민 Oct 20. 2019

스틸 앨리스

민영의 이야기 - 나는 언제까지나 나일까

스틸 앨리스 (리차드 글랫저 감독 2015), 그리고 민영의 이야기


  복도에서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민영 씨의 발자국 소리가 분명하다. 오늘도 다른 날과 다름이 없다. 영화관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지각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에 일곱이면 민영 씨가 가장 먼저 도착한다. 민영 씨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뭐 도와줄 거 없어요?”라고 묻는 일이다. 그러면 나도 습관처럼 “할 거 없어요.”라고 쑥스럽게 말한다. 매번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다.

  민영 씨의 생활에 대해서 언젠가 구체적으로 들은 바가 있다. 우리 모임에서는 영화가 끝나면 열댓 명 정도가 남아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것이 일상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갑자기 누군가가 “오늘은 밖에서 커피 마시는 게 어때요?”라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온다. 그런 일은 드물다.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된다. 그래서 식구들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혹은 개인적인 저녁 일정 때문에 총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바쁘다. 그런데 영화의 여운이 길다거나, 뭔가 다 꺼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되면 누군가 그런 제안을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영화감상 소감과 함께 묻어 나오기도 하지만 장소를 카페로 옮기면서 이야기는 점점 사적이 된다.

  

  자신의 생활이 그다지 유쾌할 일이 없기 때문에 민영 씨는 유독 밝은 영화를 좋아했다.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영화, 한참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영화가 좋다고 했다. 그런 영화를 보면 영화가 상영되는 1시간 반, 혹은 2시간 정도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영화는 아마 보러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민영 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오늘 상영할 영화는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였는데 결코 밝은 영화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다. <스틸 앨리스>에서 주인공인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는 세 아이의 엄마이면서 대학교수로서 완벽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자신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알츠하이머 유전자를 자녀에게도 물려줬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앨리스는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기보다는 끝까지 앨리스로서의 자신을 지켜내고자 노력한다.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 환자로 인해 가족이 겪는 고통이나 가족관계의 변화에 대해 다루기보다는 가능한 한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환자의 시각으로 서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여타 투병 영화들과 차별된다. 앨리스는 죽음을 택해서라도 자신을 통제하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시도를 하지만 실패한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앨리스의 바람은 실패했지만 앨리스라는 정체성의 유지는 가족의 도움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영의 이야기 - 나는 언제까지나 나일까


 민영은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다. 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지 벌써 7년째다. 처음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는데 노환과 겹쳐지면서 증상은 날로 악화되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치매 증세까지 나타나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기도 하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한다. 점점 힘들어지지만 민영 씨는 한 번도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남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듯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잘난 형제자매들이 많지만 그 누구도 내 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민영과는 달리 모두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사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한때 아버지의 자부심이기도 했던 형제들은 모두 명문대 출신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 잘 살고 있었다. 민영 역시 재수 끝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 전문 통역사로 일하면서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는 바람에 아버지 간호는 미혼인 민영의 차지가 됐다. 형제들이 아버지 돌보기에 난색을 표할 때, 민영은 스스로 간호를 자처했다. 간호는 어차피 자신의 몫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없는 삶이란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큰 언니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부터 아버지와 민영은 늘 함께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다른 형제들은 이미 다들 출가한 뒤였다. 아버지는 뒤늦게 얻은 막내딸, 민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줬다. 민영은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자신의 편이 돼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잠이 드신 걸 확인한 후 잠시 거실로 나와 커피를 마시던 민영은 거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흰머리가 언제 저렇게 많아졌지?' 그러고 보니 거울을 안 본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요새 며칠 동안 아버지는 밤중에 설사를 여러 번 하셨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잠을 제대로 잔 게 언제인가 싶었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 세상에 덜렁 혼자 남게 된다는 생각이 민영을 두렵게 만들었다. 누구라도 내 편이 한 명이라도 있어주는 것, 그것이 민영의 소박한 소망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생명의 끈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던 자신의 소망마저 의심될 때가 있었다. 아빠... 우리 아빠... 아버지...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오고 콧날이 시큰해온다. 한 때 민영의 우상이었던 아버지와 지금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저 노인네는 같은 사람일까.


   선망의 대상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된 여성의 이야기는 민영에게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 얘기처럼 느껴졌다. 만석꾼의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 세대의 사람들 같지 않게 기골이 장대했으며 얼굴까지 잘 생긴 탓에 여러 여성들의 애를 태웠던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앨리스가 하나씩 지적 기능을 상실해가는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과 같았다. 평상 시라면 꿈에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습 역시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자신의 정체성이 이미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버리듯 무에 가까워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자신이 있을까. 민영은 앨리스의 모습이 처음에는 아버지에서 자신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앨리스가 겪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명석하고 공부를 많이 해도 알츠하이머나 노인성 치매로부터 안전지대에 있진 않다는 것을 주변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인 이태영 박사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있다. 머리를 많이 쓰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면서 농담조로 고스톱을 꾸준히 해야 하느니, 계 조직을 해서 자꾸 돈 계산을 해야 하느니 하는 말들은 다 틀린 것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스틸 앨리스>를 보는 민영에게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전망 없이 허공을 떠돌던 자신의 발밑에 단단한 그물망이 처진 것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물망 밑으로 발아래 세상이 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단단한 바닥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 밑으로 몸이 빠져 추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빠져봤자 발뒤꿈치 정도고 그냥 살짝 들어 올리면 되는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이것은 참 특이한 현상이다. <스틸 앨리스>는 민영의 생활과는 다른 영화다. 이 영화는 환자를 돌봐야 하는 사람의 시각이 아닌 환자의 시점에서 촬영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민영은 역설적으로 그런 점에서 위안을 받았다. 아픈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경 유학생에 멋진 외모로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볼품없는 노인네로 전락해 대소변을 딸에게 받아내게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은 딸인 자신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아버지가 치매기도 있으셔서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가끔 정신이 맑아질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딸을 향한 미안함을 비추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많지 않았다. 짜증과 불만을 더 많이 표현했다. 이제 더 이상 민영이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민영은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미운 적도 많았고 혐오스러운 적도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분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이다.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은 참 받아들이기 힘들다. 세상이 뒤흔들리는 기분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도 어제와 같은 나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든지, 스스로 생각해왔던 내 자신과 얼마나 달라졌든지, 그것이 모두 나라는 통합적 인격체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사실을 주변에서, 특히 가족이 인정해줘야 그다음 삶도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민영에게 심리적인 위안을 준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전 08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