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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19. 2019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준우의 이야기 - 만질 수 없음에 대한 애도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도리스 되리 감독 2008), 그리고 준우의 이야기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만든 <동경 이야기>의 리메이크 작이다. <동경 이야기>에서는 일본의 노부부가 자식들을 방문한 뒤, 온천에서 쉬다가 아내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자식과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에 배우자의 상실로 인한 고독이 겹쳐지면서 자신의 죽음도 예감하는 영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일본인의 특성이 그렇듯 오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아버지의 경우는 아들이나 아내가 죽은 경우에도 표정에 변화가 별로 없다. 그냥 벌어진 상황을 수용할 뿐이다. 심지어 쓸쓸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감정을 절제한다. 그러나 독일 버전의 리메이크작은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배우자의 상실로 인한 고독감이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돼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이전에도 몇 차례 봤던 영화지만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장면이 한두 개가 아니다. 나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안다. 그 사이에 내게도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월만큼 나이가 든 것도 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기 때문에 죽음이란 단어의 무게감이 달랐다. 죽음을 향한 상념은 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기저에 깔려있다. 등장하는 대사마다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 혹은 역설적으로 해석하자면 ‘유한한 만큼 소중한 삶’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관객 역시 자신의 성격과 삶의 환경에 따라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보게 될 것이다.



* 준우의 이야기 - 만질 수 없음에 대한 애도


  준우는 영화는 주로 영화관에서 봤다. 집에서 컴퓨터나 tv로 영화를 보면 화면도 작을뿐더러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다. 집 근처에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생긴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서 영화를 본다. 스크린 크기나 음향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상업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다시 보면 새삼스러울 때가 많고 가끔 놓친 영화들도 볼 수 있어서 좋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역시 이미 한 번 본 영화라서 올까 말까 살짝 망설였다. 그렇다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왔는데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낌과 차이가 많이 나서 놀랐다. 몇 년 전에 봤을 때는 영화 속에 일본풍 소품과 문화가 너무 많이 나와서 살짝 거부감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부토 댄스 역시 불편한 느낌을 줬다. 피부를 하얗게 분칠하고 눈 주변을 시커멓게 칠하고 입술을 시뻘겋게 칠한 얼굴은 좀비를 연상시켰다. 오래 들여다보기 힘든 모습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정착지는 죽음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평생을 함께 해온 배우자의 죽음 바로 뒤에는 본인의 죽음이 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상실감을 극복하려 노력하다가 죽음이라는 결말로 끝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준우에게 두 가지 층위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부모의 죽음과 한 여인의 죽음이다. 준우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암으로 아내를 잃었다. 어머니 상을 치른 지 일 년만이었다. 며느리의 죽음을 보지 않고 돌아가신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준우와 가장 가까웠던 여인 두 명이 차례로 사라지자 준우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멍해졌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녔다. 사람들은 준우에게 꿋꿋하게 잘 사는 걸 보니 정신력이 정말 강하다고 칭찬해줬다. 그런데 문제는 한참 후에 터졌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운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잠자던 세포들이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아내의 죽음이 갑자기 실감됐다. 준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자신의 몸속 깊은 어딘가가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면 아내의 죽음은 자신의 살갗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깥세상의 공기가 살에 닿을 때마다 시리고 쓰라렸다. 한 달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서 와인과 친구를 하며 지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쌓아만 두었던 와인들이 하나둘씩 없어지고 늘 꽉 차 있던 와인냉장고가 다 비워질 무렵이었다. 밖에 나가서 술을 더 사 와야 하나 망설여졌다. 거울로 얼굴을 보니 도저히 밖으로 나갈만한 형상이 아니었다. 대충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뒤 집 밖으로 나섰다. 한 달 전보다 날씨가 많이 풀려 있었고 뺨에 와 닿는 공기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왔다. 맥주를 보니 갑자기 영화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그렇게 간 후로 지난 일 년 간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 예전에 아내와 함께 집에서 보려고 프로젝터를 구입한 적이 있다. 처박아놨던 프로젝터를 삼각대 위에 올리고 스크린을 쳤다. 서재는 무덤 속처럼 깜깜해졌다. 죽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려움이나 답답함보다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이 주는 포근함에 파묻혔다. 그때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 엄마의 품속에 달려들어 한참 동안을 그대로 있었을 때가 생각나서 눈물이 쏟아졌던 기억이 날 뿐이다.     

  오늘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을 보면서 준우는 무형의 죽음과 상실감을 형상화하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을 지켜봤다.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느껴지면 없애고 싶고 아픈 곳이 있으면 낫게 하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상실감,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조차 파악도 되지 않는다. 남들이 정해놓은 단어만이 의미 없이 떠다닐 뿐이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루디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른다. 아내만 루디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곧 사라질 남편이기에 함께 하는 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반복되는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해 자식들이 사는 도시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난다. 자식들 역시 부모의 출현으로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것을 매우 불편해한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다. 자식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감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이왕 떠났으니 발트해를 보자고 잠시 머물렀던 해변 근처 모텔에서 아내가 돌연사를 당하고 만다. 루디는 아내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늘 자신의 곁에 있었던 아내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도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게 이상하기만 하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 아내의 자리에 아내의 옷을 놓고 하릴없이 중얼거린다. ‘당신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라고.


  준우는 저 상태를 알고 있다. 나의 몸은 이곳에 있으나 정신과 영혼은 나의 몸을 일탈해 허공을 맴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죽은 이의 몸은 여기에 없는데 그의 영혼은 자꾸 주변을 맴돈다.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현실, 이해할 수 없는 나의 감정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준우는 컴컴한 방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했다. 프로젝터의 스위치를 누른 것도 며칠이 지난 후였다. 프로젝터에서 나온 불빛을 보자 마치 자신의 영혼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영화보기에만 몰두했다. 외부의 영화관을 찾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아내에 대한 애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는 의미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사랑이 남기고 간 것들>에서는 일본의 부토 댄스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루디의 아내, 트루디는 평소에 부토 댄스를 배우고 싶어 했다. 기묘한 분장과 고통스럽고 추한 표정, 시체 같은 몸으로 표현하는 부토 댄스는 죽음의 춤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림자의 춤이라고 불렀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육체와 그림자처럼 늘 붙어 다닌다. 트루디는 왜 죽음의 춤을 그렇게 열망했을까. 루디 부부가 가는 곳에는 파리 한 마리가 등장한다. 파리는 루디를 따라다닌다. 며느리가 파리를 눌러 죽이자, 트루디는 ‘하루살이’라는 시를 읊는다.


그만! 이건 살인이야

꼭 그렇게 잔인할 필요 없지

하루살이에겐 단 하루뿐

단 하루의 고통

단 하루의 쾌락

오 하늘을 날게 하여라

마지막이 올 때까지

그의 하늘은 하루의 인생

그의 천국은 하룻밤이니


  트루디는 남편이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에도 인간의 삶이 결국 하루살이처럼 맥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준우의 눈에는 트루디가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예고 없이 어느 날밤 갑자기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준우는 아내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던 순간의 눈빛을 기억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그 순간이 죽음을 느끼는 순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루디의 아내는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부토 댄스에 대한 열정, 가장 아꼈던 아들, 클라우스에 대한 그리움, 남편과 함께 후지산을 보고 싶은 열망이 그것이다. 그래서 루디는 마치 아내의 영혼을 찾으려는 듯 아내의 흔적을 찾아 일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클라우스가 머물고 있는 도쿄에 도착한다. 그런데 독일에서 따라다녔던 하루살이 파리가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는 벚꽃이 있다. 가장 화려하게 피었다가 어느 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벚꽃도 하루살이처럼 허무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에 나온 대사처럼 벚꽃은 가장 아름다운 덧없음의 상징이다.

  아내의 향기, 아내의 숨결, 아내의 품이 아직도 느껴지는데 정작 형체는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루디 역시 대체 지금 아내의 몸은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묻는다. 곁에 있는 게 느껴지는데 정작 만질 수는 없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루디는 부토 댄스를 추는 소녀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든다. 루디가 일본에 가려고 한 것은 아내의 영혼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본 어디에서도 아내 영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도쿄의 밤거리를 채우는 것은 성문화뿐이었다. 벚꽃 아래서 부토 댄스를 추는 소녀를 보는 순간 그는 아내의 영혼을 찾은 기분이 된다. 부토 댄서인 유는 벚꽃 아래서 분홍색 수화기를 들고서 퍼포먼스를 한다. 유는 돌아가신 엄마가 분홍색 수화기를 들고 자신과 늘 통화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엄마는 자신 안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죽은 이의 실체를 찾는 루디의 마음을 헤아린 듯 유는 주변에 있는 사물들로 죽는 이들을 비유한다. 유는 자신의 어머니는 기분이 즐거웠다, 슬펐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자맥질하는 오리라고 했다. 루디는 자신의 아내를 우리에 갇힌 들고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의 영혼을 우리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아내의 영혼과 함께 할 방법이기도 하다. 루디는 아내가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신을 통해 이루게 하는 것이 아내의 영혼과 함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루디의 몸은 저절로 아내가 생전에 루디와 함께 보고 싶어 했던 후지산을 향한다.

  준우는 아내의 흔적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아내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을까.’ 준우는 루디가 후지산이 자신의 도착지인 듯 자나 깨나 후지산을 보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내의 옷을 입은 루디는 결국 후지산이 보이는 곳에서 아내와 함께 부토 댄스를 추는 환상에 빠져서 춤을 추다가 사망한다. 결국 아내와 영혼과 함께 하고 싶은 소원을 이룬 것이다. 준우는 자신도 언젠가는 아내의 영혼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누군가를 만질 수 없다는 것이라고 준우는 생각했다. 그래서 준우는 아내가 코마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옆에 앉아서 계속 아내의 얼굴을 만졌다. 따듯한 피부의 촉감을 계속 느낄 수만 있다면 잃을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속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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