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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2. 2019

플로리다 프로젝트

성희의 이야기 - 우리는 놀이 공원 옆에서 산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감독 2018)

*성희의 이야기- 우리는 놀이 공원 옆에서 산다


  성희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포스터를 봤을 때 자신이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디즈니월드니, 무지개 어드벤처니,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영화니, 하는 문구를 보면서 아이들의 천진함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의 아이들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의 오프닝 씬은 그런 기대에 맞는 느낌이었다. 무니와 스쿠티는 보라색 벽에 따분한 표정으로 기대어 앉아 있다. 어디서 무니와 스쿠티를 반복해서 부르는 남자아이의 소리에 두 아이는 생기를 되찾는다. 둘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고 오프닝 크레디트와 함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즐거운 기대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다음부터 이어지는 장면들은 성희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었다. 성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주인공인 여자 아이 무니는 말 그대로 악동이다. 어른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다. 기가 죽기는커녕 어른들이나 쓸 만한 욕설을 내뱉는다. 무니의 말투는 귀여운 얼굴과는 영 딴판이다. 무니는 엄마 핼리가 쓰는 말투를 그대로 배웠다. 무니와 핼리는 똑같은 말투에 똑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의 눈빛이나 억양 하나에도 무니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대응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모녀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사이다. 무니와 핼리는 둘 다 세상을 향해 반항하는 악동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명은 진짜 아이고 다른 한 명은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다. 핼리는 미혼모의 몸으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기가 힘에 겹다. 그녀는 취직을 위해 애쓰지만 특별한 기술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며, 말투와 행동거지도 불량한 핼리에게는 직장 구하기도 힘들다. 두 사람이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쓰는 방법이 있다. 막말을 해대며 반항하거나, 둘만의 세계로 도피하는 일이다.


  성희는 무니와 핼리를 보면서 두 사람을 증오했다. 둘 다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점점 무니가 불쌍해졌다. 가슴속에서 표현키 힘든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리고 성희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팔에 잔 소름이 돋았다.


  성희의 엄마는 무니의 엄마, 핼리처럼 교양 없고 대책 없이 날뛰는 여자가 아니었다. 성희의 엄마는 예뻤다. 성희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곱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엄마가 학교라도 오는 날이면 성희는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친구 엄마들 중 그렇게 세련되고 고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서 엄마가 레이스 달린 양산을 쓰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성희는 일부러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달려갔다. 저 예쁜 여자가 우리 엄마라는 걸 친구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크게 소리쳤다. 엄마는 생각만큼 활짝 웃어주지 않았다. ‘웬 수선이람’이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했다.

  엄마에게 중요한 사람은 자신 한 사람뿐이었다. 세상이 뒤집혀도 엄마는 자신만 안전하다면 세상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사람이었다. 성희가 학교에서 식중독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갈 때도 성희 엄마는 집에 없었고 한참 동안 연락이 되질 않았다. 뒤늦게 병원에 온 엄마는 역시 곱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화장한 엄마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는 현실과 동떨어진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혼자 마법의 성에서 우아하게 살던 엄마의 삶은 어느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성희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모든 가구들에 빨간딱지가 붙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몇 달 동안 일을 수습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아버지가 쓰러져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자, 마법의 성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필 성희가 고3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 엄마는 성희에게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성희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최소한 대학까지는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학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성희는 다행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받은 점수보다 한참 낮은 대학에 지원해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들어갈 돈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성희는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힘들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외모 꾸미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쌀통에 쌀이 떨어져도 성희 엄마는 곱게 화장하고 영화관에 갔다. 배가 고파도 영화를 굶을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늙지 않을 것 같은 엄마의 얼굴에도 점점 세월의 흔적이 남겨졌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고왔다.


  성희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구질구질한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털어놓기에는 성희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엄마에 대해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다른 엄마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엄마들은 대부분 늙어가는 자신보다 성장하고 있는 자식들을 우선시했다. 자신은 허름하게 입고 다녀도 자식들의 옷은 사주는 엄마들이었다.

  성희를 더 외톨이로 만든 것은 엄마를 둘러싼 이상한 소문이었다. 성희와 엄마가 동네에서 왕따가 되고 있다는 점은 비슷했다. 성희는 정신없이 사느라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어서 그런 신세가 됐다지만 엄마의 경우는 달랐다. 주변 사람들의 경멸에 찬 눈빛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몸으로 느껴진다. 성희는 엄마에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왜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그렇게 차가운지. 성희는 그저 모른 척했다. 엄마가 낮에 누구를 만나고 뭘 하고 다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성희에게 그냥 엄마일 뿐이고 엄마도 엄마의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성희는 자신의 세계와 엄마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 한 곳만 일치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한 곳조차도 일치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성희에게 엄마는 점점 더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도 성희를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온전히 나의 엄마인 적이 있었을까. 성희는 가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늘 손 안에서 거짓말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 같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면서 성희에겐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올라왔다. 첫 번째는 그리움이었다. 오프닝 씬에서 무더운 여름에 축 늘어진 채, 무력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무니와 스쿠티는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연거푸 ‘왜?’를 반복하며 노래하듯이 대답한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지루한 두 아이들에게 친구가 신이 나서 부르는 소리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부르고 응답하는 것은 사고칠 일을 발견했다는 신호이며 그들만의 시공간이 열리고 있음을 뜻한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현실의 시공간에서 상상의 시공간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싸구려 모텔 위로 솟아오른 무지개 위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터였다.

  

  성희에게도 그런 무지개를 볼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속에, 엄마의 미소 속에 무지개가 있었다. 언제라도 무지개를 볼 수 있었던 시절에는 성희도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 시절이 그리웠다.


  무니는 관광객들에게서 잔돈을 구걸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무니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엄마에게 배운 기술이다. 천식에 걸려서 의사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했는데 돈이 모자라서 못 산다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관광객들은 거짓말인 줄 알지만 아이들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하지만 무니는 절대로 혼자서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 늘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한 개를 나누어 먹는다. 친구와 함께 먹는 아이스크림이 무니에게는 의미가 있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디서 살든 무니는 즐겁게 살 수가 있다.


  무니에게 엄마는 그냥 생활을 유지해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니가 접하는 현실은 오히려 환상이 가미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그래서 아동국 직원들이 무니에게 심상치 않은 질문을 던지며 접근했을 때 엄마와 헤어짐을 예감한다. 무니는 엄마에게 매달리는 대신 밖으로 내달아난다. 무니가 간 곳은 늘 함께 놀던 친구 젠시의 집이다. 젠시 앞에서 무니는 처음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낸다. 여태 못된 작은 어른처럼 굴던 무니는 비로소 아이의 모습이 됐다. 평상 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무니의 태도와 표정을 보던 젠시는 사태의 심각함을 온몸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갑자기 무니의 손을 잡고 달려 나간다. 두 아이가 손을 잡고 옆 동네에 있는 디즈니월드로 뛰어가는 모습은 환상적이다. 표정만으로도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눈물 나도록 행복한 일이다. 성희는 두 아이가 디즈니월드의 성 안에서 어떤 어른도 찾을 수 없는 곳을 발견했으면 하고 바랐다. 어른들은 늘 아이들의 꿈을 방해하는 존재니까.  


  두 번째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그것은 엄마가 아닌 세상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성희는 자라면서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고 엄마를 이해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밉지는 않았다. 영화에서 핼리는 자신의 감정대로 무책임하게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무니는 핼리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왜 핼리가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지, 핼리와 함께 침대에 오른 남자가 누구인지, 왜 친구 스쿠티의 엄마가 종업원으로 일하는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음식을 왕창 시킨 후 다 먹지 못한 음식을 싸 달라고 해놓고 길가에다 버리는지, 무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무니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엄마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수용한다. 엄마의 삶과 자신을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와의 삶은 위태롭다. 무니는 피부로 그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엄마는 세상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고 무니는 그런 엄마의 태도를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니 역시 친구들과 함께 세상에 반항하는 놀이를 한다. 새 차에 침 뱉기 놀이, 동네 아줌마에게 욕하기, 빈 집에 불 지르기, 출입금지 구역인 기계실에 들어가 전원 차단하기. 엄마가 세상의 규칙을 어기는 행동으로 자존감을 지켜나가듯이 무니도 엄마의 흉내를 낸다.

 

  성희의 엄마 역시 예측하기 힘든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물론 성희의 엄마는 무니의 엄마, 핼리처럼 머리를 물들이고 늘 담배를 입에 물고 입술에 피어싱을 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희의 엄마는 겉보기에 깔끔하기 그지없는 천생 여자의 모습이었다. 지구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핼리와 비슷하다. 핼리는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상대가 누가 됐든지 ‘엿 먹어라.’를 외치지만 성희의 엄마는 눈과 귀를 막고 외부세계와 자신을 차단하는 것으로 거부했다.   성희의 엄마는 고립된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숨 쉴 곳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마치 오리가 물밑에서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대듯이 엄마의 머릿속은 늘 복잡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성희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엄마는 성희에게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현실적인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확실치 않은 존재감이 성희를 더욱 엄마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한눈이라도 팔면 엄마는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사업도 계속 유지됐을 거였고 그랬다면 성희의 가정도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세계 속에 살았던 엄마도 계속 성희의 엄마도 남아있을 터였고 엄마의 세계가 변형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예전의 성희 엄마가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뀐 엄마의 흔적을 접할 때마다 성희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차올랐다. 언젠가는 자신의 곁에서 사라져 버릴 존재 같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자신들을 버려두고 세상을 떠났듯이 엄마도 조그마한 조짐도 보이지 않은 채,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왜 세상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가. 이런 불안정하고 고단한 삶이 끝나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성희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과연 내 편인가.’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엄마와 정서를 함께 나누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공유하는 시간도 공간도 감정도 없었다. 이 세상에 성희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성희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에게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는 언젠가는 끝나게 될 것이다. 물감이 물속에서 실오라기처럼 풀어지다가 언젠가는 물에 삼켜지듯이 현실의 어두운 색깔이 스며드는 일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엔딩 씬에서 두 아이는 디즈니월드 안에 있는 마법의 성으로 달려가지만 마법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니는 언젠가는 더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마법의 성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성희는 이제 자신도 그만 엄마의 유령만이 존재하는 성으로부터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자신만의 성에서 나와 성희를 찾는다면 그때는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엄마로부터 벗어나야 할 시간이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마법의 힘이 이제 풀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무니는 쓰러진 고목 위에서 놀다가 젠시에게 말한다. “내가 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기 때문이야.”라고. 성희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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