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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5. 2019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희진의 이야기- 기억을 건져내는 그물과 만나다

 로마 (알폰소 쿠아론 감독 2019) 

 *희진의 이야기 - 기억을 건져내는 그물과 만나다


  희진은 오늘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영화를 감상하러 왔다. 영화 제목이며 감독, 배우, 줄거리 등 사전 정보를 확인하며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희진은 영화 보러 오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월요일 아침이면 동사무소에서 하는 요가 수업을 들은 후에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본 영화가 뜻밖에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인을 제공하게 될 줄은 몰랐다. 희진은 ‘로마’라는 제목도 생소한 이 영화가 잊고 있었던 시절을 끌어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스크린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이 다채로운 색상과 그림 같은 자연환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집을 중심으로 한 안팎의 풍경에 있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살았던 집과 동네를 떠올리게 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은 채, 사물만 비출 때도 어떤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있다. 사물이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하녀 역의 멕시코 원주민도 특이하다. 영화에 나오는 백인 여성들의 표정이 다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녀인 클레오의 표정은 무척이나 억제되어 있다. 백인 여성들은 힘들 때, 무서울 때,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지만 클레오는 그러는 법이 없다. 마치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훈련이라도 받은 얼굴이다. 클레오의 표정과 외국인이 사는 멕시코 집의 풍경이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화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클레오가 일하는 집의 부분이 어린 시절 희진이 살았던 집과 비슷했다. 첫 장면에서 클레오가 출입구 바닥을 물청소하는 장면부터가 옛 시절을 자극했다. 거품이 도는 물은 점점 많아지고 그럴수록 구정물 색을 뗘간다. 그리고 그 물에 하늘이 비치고 비행기에 그 안에 잡힌다. 물청소를 하는 이 공간에는 지붕이 없어서 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주인공인 이 집의 하녀 클레오는 열심히 물청소를 마치고 자신의 영역으로 사라진다. 클레오의 모습은 백인 집주인과 그 집의 뽀얗고 길쭉길쭉한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클레오는 머리도 커 보이고 다리도 짧은 멕시코 원주민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익숙하다. 희진이 어렸을 때, 집에서 일하던 식모 언니를 생각나게 만든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골에서 십 대 후반의 처녀들이 대거 도시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했던 시대니 멕시코의 시대 배경과 비슷하다.


 희진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희진의 집에는 일하는 언니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나이 든 사람들로 바뀌어갔다. 그 전에는 희진 나이 또래나, 두세 살 많은 언니들이 일을 하러 왔다면, 나중에는 희진 어머니 또래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바뀌어갔다. 희진 또래의 언니들은 희진의 성장기에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남겼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기억들이 재해석된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얼굴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너무 철이 없던 시기였다.

  유난히 클레오의 얼굴을 닮은 식모 언니가 있었다.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됐을 것이다. 결혼을 했을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감정을 노출시킬만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아서다. 더욱더 어색할 뿐이고 오히려 그쪽에서 희진을 거부하고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다. 희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알기조차 두렵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됐냐라며 눈을 흘길 것만 같다.

  희진은 그녀를 한 번도 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나이가 몇 인 지도 정확히 몰랐다. 희진보다 많은 것은 확실했다. 희진이가 아직 가슴도 나오지 않고 생리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희진보다 키는 작았지만 부담스러울 만큼 큰 젖가슴을 달고 다녔다. 희진이가 아직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직 여자가 아니라는 둥 하면서 놀려대 희진을 열 받게 만들었다. 희진은 언니라고 하는 대신 이름을 불렀다.

  “행순아~ 밥 줘~ 행순아~ 내 빨간색 바지 엇다 뒀냐. 행순아, 행순아.”

진짜 이름이 행순인지, 형순 인지도 잘 모르겠다. 성도 모른다. 왜 단 한 번도 나이도 이름도 확인하려 들지 않았을까. 희진의 동생들 역시 행순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도 모두 행순이라고만 불렀다. 행순이는 자신을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우리를 혼내거나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순이가 결코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행순이는 유치한 방법으로 우리를 약 올리거나, 무시했다.


  우리 형제들이 행순이를 무시하는 것은 그녀가 순전히 우리 집에서 일하는 식모여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도 상대방의 인성이 어느 수준인지는 알아채는 법이다. 행순이는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었으며 우리 남매들이 가장 무시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행순이는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다른 식모들이 결혼을 하든 다른 일을 찾든 희진의 집에 머무는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행순이는 몇 년간이나 희진 식구와 함께 살았다. 희진 식구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행순이도 같이 따라왔다. 행순이는 우리를 자기 식구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을 떠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일하는 애들이 쉽게 그만둔다고 불평했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행순이를 나가라고 했다. 행순이는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나가지 않으려고 했으며 화를 냈다. 희진은 양쪽 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가 별로 잘 대해 주지도 않았는데 나가지 않으려는 행순이와 굳이 서울까지 데려와서 내보려고 하는 어머니나 둘 다 이상했다. 행순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행순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행순이도 이제 독립할 나이가 됐다. 이 집에서 나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한데 왜 나가려고 하지 않을 걸까. 희진은 특별히 섭섭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시골에서 친척이 행순이를 데리러 왔는데 행순이가 큰 소리로 다투는 것을 들었다. 희진의 어머니가 제시한 조건에 친척은 별 불만이 없는 듯했다.  


  문제는 행순이었다. 돈문제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런 느낌은 온다. 하지만 희진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행순이와는 사실 별로 정이 든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이 들기는커녕 행순이는 알게 모르게 신경에 거슬리는 사람이었다.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전혀 언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희진과 동생들은 행순이를 무시했고 그런 희진과 동생들을 행순이도 무시했다. 서로 존중할 줄 모르는 관계였다. 희진은 하녀, 혹은 식모와 주인집 아이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희진은 친구 관계며, 선생님들과의 관계며 여러 가지 신경 쓸 곳이 많아 복잡한 심경이었기 때문에 행순한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냥 빨리 일이 해결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안정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결국 인사도 없이 행순은 집을 나갔다. 시골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서울에서 다른 집으로 간 것인지, 공장으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수년간을 함께 산 사이였는데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었을까. 행순이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다정스럽게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럴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갔다. 그럴 기회가 한번 있긴 했는데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린 것이다. 행순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집에서 사라졌어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 중 행순이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도 다른 가사 도우미들이 집으로 들어왔고 행순이는 원래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 뒤로 몇 년쯤 지났을까. 씩씩거리며 집을 떠났던 행순이가 인사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희진이는 그때도 반갑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었다.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인 집을 다시 오고 싶었을까. 행순이는 한 때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때 행순이에게 최소한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정도는 물어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희진은 너무 어렸다. 나이가 어렸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희진에게 아직 삶이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불과했다.

  행순이가 인사차 희진의 집을 방문한 것은 본인으로서는 힘든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희진 가족에게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흔적을, 혹은 온기를 확인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행순이는 이미 성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눈빛이나 느낌이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희진 역시 이제 생리도 하고 브래지어도 착용할 만큼 성숙했지만 여전히 행순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행순이가 학교는 어디 다녀라고 물었을 때, 희진은 속으로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생각하면서 짧게 무슨 고등학교라고 답했다. 그게 다였다. 그 뒤로 다시는 행순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행순 얼굴의 특징은 잊히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으로 본 얼굴의 표정이 선명했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행순의 얼굴을 그렇게 관심 있게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로마>를 보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행순을 떠올렸다.  


  희진이 영화를 보면서 작은 충격을 받은 것은 클레오와 주인집 아이들의 관계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클레오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클레오 역시 주인집 아이들이지만 진심으로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관계가 가능한 것일까.

  안주인은 클레오에게 결코 다정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그녀를 존중해줬다. 심지어 임신을 했다고 하는데도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게 하고 아기용품까지 사주려고 했다. 하지만 클레오는 뱃속의 아이에게 애정이 없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클레오를 떠난 것도 모자라, 자신이 아버지임을 부정했으며 클레오의 목숨까지 위협했으니까. 클레오는 결국 아이를 사산했다. 자신의 아이는 죽었지만 주인집 아이들을 목숨을 걸고 구했다. 클레오가 아니었으면 주인집 아이들은 바다에서 익사했을 것이다. 아이의 목숨을 구한 뒤, 클레오는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어요 ‘라고 말하면서 클레오는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린다.

  모래사장에서 집주인의 식구들과 클레오가 서로 껴안고 우는 장면은 한 장의 명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물들 뒤쪽에서 비쳐오는 햇빛이 엉켜있는 사람들을 마치 조각품처럼 만들고 있었다. 저렇게 꽁꽁 뭉쳐있다면 상처 받는 일이 있다고 해도 서로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엄마보다 클레오에게 더 밀착했다. 클레오에게 기대거나, 클레오를 한 팔로 감싸 안거나 했다.

 클레오 주인집 식구들이 거실에 모여서 TV를 볼 때 클레오도 후식 접시를 치우다가 슬쩍 자리에 앉아 함께 시청하는 장면도 낯익다. 희진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TV가 한 곳에만 있었기 때문에 희진 집도 저녁식사 후에는 모두 한 곳에 모여서 함께 봤다. 할머니도 있고, 형제들도 많았기 때문에 방안에 거의 열명 정도가 모여서 함께 봤는데 그중에는 가사 돕는 사람도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독특한 경험처럼 생각된다. 지금은 집에서 가족이 함께 모여 서로 살을 부딪혀가며 TV를 시청하는 일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휴대폰이나 아이패드, 혹은 개인 컴퓨터로 각자 시청하니까.

 남의 집에 살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클레오도 행복한 표정으로 TV를 보다가 여주인의 지시를 받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클레오가 옥상에 만들어놓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면서 카메라는 비슷한 형태의 다른 가옥들을 비춘다. 옥상에 모두 빨래터와 빨래 걸이를 만들어놓았는데 그곳에서는 클레오 같은 하녀들이 빨래를 너는 모습이 보인다. 아래층 아이들의 삶과 옥상에 있는 하녀들의 삶은 다르다.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총싸움을 하는 놀이터인 것처럼. 그렇지만 클레오는 막내인 니콜라가 총에 맞아 죽은 척하자, 함께 누워 죽은 척해줄 줄 아는 하녀다.

 클레오는 자신이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주인집의 백인 소녀와는 분명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여주인이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홀로 남은 것처럼 백인 소녀 역시 늘 안정된 삶을 살아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을 맞이할 수도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희진은 자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집에서 일했던 식모 언니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하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신의 삶이 과연 뭐가 그렇게 특별한 것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행순에게 더 잘해줄 수 있었을까. 그럴 자신은 없다. 다만 행순이에게 그녀의 삶은 어떤 것이었는지, 묻고 관심을 가져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녀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희진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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