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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Oct 23. 2019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

유경의 이야기 - 나만의 섬에서 살아가기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 (마이크 뉴웰 감독 2018), 그리고 유경의 이야기


  아직은 겨울이지만 날씨가 살짝 풀리면서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다. 집에 있고 싶은데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짜증이 났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되면서 외출을 삼가라니,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짜증이 난다. 이게 무슨 청개구리 같은 심보인지 모르겠다. 하지 말라면 꼭 더 하고 싶어 진다.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은 이런 마음으로 봤던 탓이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의 채널 제도에 있는 건지섬이라는 배경 때문일 것이다. 밝은 날인데도 미세먼지로 뒤덮여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뿌연 도시와 비교되는 건지섬의 청명한 하늘과 선명한 빛깔의 꽃들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졌다. 그래서 우리 영화관의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욕망이 강하게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은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배경은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영국이다. 거리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복구가 한창이다. 물자가 부족한 탓에 배급표에 한정된 양만 살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작가인 줄리엣 애쉬톤은 건지섬에 사는 한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우연히 줄리엣 애쉬톤이 판 중고서적을 손에 넣게 된 도시 아담스가 보낸 편지였다. 나치 점령 하에서 서점이 파괴돼 책을 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선집을 사서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특이한 이름의 북클럽을 소개했다. 줄리엣은 그 독특한 북클럽 이름의 기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다. 북클럽의 탄생 비밀을 알게 된 줄리엣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책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북클럽에 가입하게 되면서 줄리엣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긴다.

  우리 영화관에 오는 관객은 줄리엣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경의 이야기 -  나만의 섬에서 살아가기


  유경은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들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오늘은 좀 여유 있게 왔다. 지난번에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더니 다른 사람들이 이미 좋은 좌석을 다 차지해서 불편하게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미세먼지 주의보가 떴는데도 깜빡 잊고 마스크를 하지 않고 온 게 마음에 걸렸다. 유경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  


 영화의 도입 부분에서 1941년, 나치 점령하의 건지섬이 나온다. 어두운 밤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몰려가다가 나치군에게 걸리고 만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수상쩍은 집단이다. 첫 장면부터 불편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바로 이 순간,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문학회가 탄생한 것이다. 나치 점령군이 가축이며 야채며 식량원을 모두 몰수해가자, 섬사람들은 먹는 이야기만 나와도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된다. 특히 문학회에서 버터를 바른 돼지고기 구이요리 레시피를 발표한 회원은 모두의 원성을 산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실제로 돼지고기 구이를 먹게 된 것이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점령군의 눈을 속이고 몰래 돼지를 빼돌린 덕분이다. 그렇게 돼지고기 먹는 모임이 생겼는데 회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치 장교에게 들킨 탓에 문학회로 둔갑하게 된다. 그것이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의 탄생 비화다. 힘든 시기를 함께 겪고 상처를 담은 북클럽 회원들은 사실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한 데 묶어 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북클럽이었지만 그들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힘든 시절을 견디어냈다.


 유경은 그런 북클럽 회원들이 부러웠다. 책을 통한 연대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젊은 시절의 유경이 꿈꿨던 것이기도 했다.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 회원들이 힘든 시기에 책으로 인해 위안을 받았듯이 대학 시절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방황할 때, 책이 유경을 붙들어 준 적도 있었다.


   유경의 눈에 줄리엣은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은 것처럼 보였다. 전쟁 때 영국의 모습을 밝은 필치로 유머러스하게 쓴 칼럼이 인기를 모아서 돈도 벌고 인기 작가가 됐으며, 부자에 잘 생긴 약혼자도 생겼으니 더 이상 부족할 게 무엇인가.

   줄리엣에 비하면 유경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대학 시절 유경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 빠져줄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엉겁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늘 동동거리며 바쁘게 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 꿈은 늘 가슴 한 구석에 있었다. 아이가 잠이 들 때면 뭔가를 써보기도 하고, 아이가 한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는 유경은 소설책을 끼고 살았다.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터라 유경의 유일한 친구는 소설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책 속의 캐릭터들은 마치 유경의 옆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이 생생했다. 소설책에 빠져 있는 동안만큼은 행복했다. 엄마가 자기랑 놀아주지 않고 책만 쳐다보자, 아이가 다가와서 책을 뺏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시 책에 손이 갔다. 아이랑 둘이서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나자, 유경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몇 시간 동안 놀다 오게 했다.  아이는 다행히 어린이 집에 잘 적응해서 어린이 집에서 배운 노래를 집에 와서도 곧잘 부르곤 했다. 그 시간을 이용해 유경은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독서모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시립도서관에 독서회가 있었다. 대부분이 유경 나이 또래의 주부들이었고, 약간 더 나이가 든 주부도 있었다. 낮에 하는 모임이라서 직장 여성은 참가하기 힘든 모임이었다. 친구 하나 없이 적적하게 지내던 터라, 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생겨서 유경은 첫 모임을 앞두고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회원들은 다 수더분했고 특별히 튀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피곤한 와중에서도 짬짬이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계획했던 만큼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임은 매주 화요일에 있었는데, 한 달 전에 읽을 책의 목록을 다 정해놓고 발표자도 정해놨는데, 발표자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나오는 경우도 발생했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갑자기 올라오셔서 발표 준비할 시간이 없었고, 집을 비우기도 힘들다는 둥, 아이가 아파서 참가할 수 없다는 둥, 이유는 주로 가정적인 것이었다. 주부들이 매주 모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이 독서회를 중요한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할 일 없는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나 떠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건지는 것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으로 유경은 열심히 참가했다. 하루 종일 아이하고만 있다 보니 어른들과 대화하는 게 그립기도 했다. 그런데 발표와 토론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경도 책을 펴놓고 잠이 드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혼자 있을 때는 책을 옆에 달고 살았는데 막상 모임에 참가하게 되니, 책을 잡기가 더 힘들어지는 이상한 상황이 됐다.


  유경은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을 보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북클럽에 처음 참가한 줄리엣이 자신의 책인 ‘앤 브론테 평전’에 대해 발표하자, 다른 멤버가 반격을 하고 다시 줄리엣이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는 식으로 등 활발하게 진행했다. 심지어 샬롯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에서 제인 에어의 대사를 줄줄 외는 멤버까지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유경의 독서모임은 너무 평면적이고 지루했다. 반격은 고사하고 책 한 권에서 요점을 짚어 발표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아니, 책을 완전하게 다 읽어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마음에 드는 구절만이라도 발췌해오기 등으로 소소하게 바뀌었다.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거나 반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반박하려면 발표자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도 어떻게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고 말하나 신경 쓰다 보니, 기회를 놓치는 일이 많았다. 불만스럽긴 했지만 독서모임에는 일 년이나 참가했다. 1년 뒤에 다른 도시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멤버 중 한 사람이 은근히 신경을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서울에서 명문대에 다녔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밝힐 때부터 기분이 나빴는데 사사건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했다. 아니면 유경이 특별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발표나 잘 해오면 인정해주겠는데, 핵심을 짚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만 물고 늘어지는 걸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첫날 선입견이 생기다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잘난 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그 멤버와 몇 차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이러다 무슨 일이 터지겠다 싶을 때 이사를 가게 돼 다행이었다. 벌써 이십 년도 지난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 사람의 문제였는지, 유경의 문제였는지도 헷갈릴 정도다. 그때는 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된다. 잘난 척하는 꼴은 도대체 보지 못하는 유경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유경도 남들 눈에는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뒷머리가 뜨거워졌다.   

 

  유경은 결국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도 버리지 못했다. 그런 꿈조차 갖지 못한다면 자신의 삶이 더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책 보다 영화를 더 찾아보게 됐다. 영화를 보고 나서 거꾸로 원작인 책을 찾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유경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던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각자 자신의 생활을 하느라 바빴다. 유경은 자신에게 생긴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쓰고 싶었다. 영화에서 줄리엣이 작가가 왜 완벽한 직업인지 말할 때 유경의 마음속에도 무지개 빛이 솟아올랐다. 줄리엣은 항상 찻주전자를 곁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작가라는 직업만큼 완벽한 직업을 없다고 말했다. 유경이 꿈꾸던 삶, 아니 지금도 꿈꾸고 있는 삶도 그런 평온한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삶이다.


  영화에서 줄리엣은 자신을 찾으러 온 부자 약혼자 마크를 따라 건지섬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온 뒤, 미친 듯이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줄리엣이 울려대는 타자기 소리가 유경에게 또다시 설렘을 가져다줬다. 유경도 저렇게 미친 듯이 자판을 눌러대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이 찍어낸 활자만 봐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방이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타자기를 두들겨 대던 줄리엣은 순식간에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 원고를 건지섬의 북클럽 회원들 앞으로 보낸다. 자신이 도시 아담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줄리엣은 마크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되돌려주고, 건지섬을 향해 떠난다. 줄리엣은 마크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공허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행운아다. 다른 사람들은 부자고 잘생긴 마크를 약혼자로 둔  줄리엣이 행운아라고 했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이 행운아다. 그것을 깨닫고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유경은 마음 한 구석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던 불빛이 마치 심지가 올라가듯 기운을 받은 기분이었다. 유경을 공허하게 만들었던 것, 유경의 빈 공간을 채워주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찾아야만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유경은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꿈꿨던 것을 행동에 옮긴다는 사실이다. 유경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표현할 때 가장 행복했다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유경은 다시 자판을 두들길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누군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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