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19
2019.04
여러 해 동안 춘천과 사우스 벤드에 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지방민의 저주'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춘천은 서울에, 사우스 벤드 역시 시카고에 한 시간보다 더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에 가끔은 도시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일이 꽤나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능성으로 존재하던 저주가 깨진 것은 올해 3월 초의 일이다.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시카고 도심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사 온 동네가 시카고 내에서도 꽤 ‘힙’하다고 소문난 곳이라, 춘천의 한적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던 나에게는 이사가 좀 색다른 면에서도 큰 변화로 다가온다. 내 집 2분 거리에 치킨 집 상호를 말하면 사람들이 십중팔구 끄덕이면서 거기 꽤 맛있지, 하는 일이 말이나 되는 일이었던가.
시카고로의 이사를 다 마치고 내게 일어난 일들 중 하나는 카페 한 곳을 마음에 들어 하게 된 것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이 1층짜리 공간은 내벽이 모두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면 천장 가운데 달린 유리창을 통과하는 자연광이 카페 전체를 한 층 밝게 만들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날에도 머리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커피의 가격은 한국의 커피전문점들의 그것과 얼추 비슷하고, 독특한 재료들을 써서 개성 있게 생긴 커피를 선보이는데, 맛은 또 그냥 평범하다. 나는 이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맛까지 탁월했으면 앉을자리가 없이 붐볐을 것이고, 나 또한 다른 공간은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딱 이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렇게 토요일이면 이곳에서 매번 다른 이름의 라떼를 주문하고(콜드 브루에 대한 검증은 첫날에 끝냈지만 이곳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카페 내부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다른 도시에서 내가 좋아했던 공간들을 생각하고는 한다. 춘천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구봉산 중턱의 한 카페였고, 서울의 그것은 낙산 공원의 작은 갤러리였다. 봉의산을 감싸 흐르는 소양강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춘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라고 생각했고, 서울에서는 혜화동을 수놓는 불빛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렇게 탁 트인 곳에서 경치를 내려다보며 갖는 평온한 마음을 좋아했었는데, 어찌 이곳에서는 기존의 표본에 없는 공간이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사실 아주 특별한 매력이 있는 공간은 아닌데 하면서.
그런 생각에 연장선상에서 언젠가는 한 도시의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닌 그 도시 자체를 좋아하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공간에 대한 애정은 그 시기가 지나고서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쪽배에 올라한 치 앞도 모르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으로 요즘 그렇게 노를 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