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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Jan 30. 2024

《사랑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하는 일》

사랑은 참 지치지도 않지!

추운 겨울을 버티고 견디며 통과하게 하는 것은, 의외로 사소한 것들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커피, 뽀송뽀송하고 두툼한 이불, 금방 손을 데워주는 손난로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독하고 고약한 날들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의 밑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헛헛한 날,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는 생각에 외로운 날, 억울한 마음을 속으로 삼켜야 하는 날은 마냥 주저앉아 엉엉 울고만 싶어진다. 이런 날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면, 살고 싶은 의지가 바닥을 치기도 한다. 이때 우리로 한고비를 넘고 그래서 또 하루를 살게 하는 건, 누군가가 나에게 베풀어 준 사랑과 믿음이다.

내게도 지금보다 더 어쭙잖고 어설펐던 시절이 있었다.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때였다. 매번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고 주눅이 들었다. 그런 나를 지금의 멘토는 때마다 일마다 격려해 주었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으켜주었다. 마음이 시릴 때는 따뜻한 차 한잔을, 위로가 고플 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자신이 없어 머뭇거릴 때는 “할 수 있어!”라는 응원을 보내주었다. 내가 나에게 해 주지 못했던 낯설고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나는 이런 따뜻한 경험을 멘토를 통해 맛보고 체험할 수 있었다. “자네를 보면 앞으로가 참 기대가 돼! 하하하!” 도대체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 1도 없는 내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을 때, 억울하고 분할 때,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냥 멀리 도망치고 싶을 때가 불시에 찾아올 때가 있다. 이때마다 내게 사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었던 분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한때는 내가 잘나서, 내 실력과 능력과 지혜로 그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살려고 몸부림을 많이 쳤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그토록 추운 시절을 나로 버티고 견디고 통과하게 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사랑과 믿음의 추억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중에 으뜸은 단연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실 사랑과 믿음은 단짝이다!)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이든, 누군가에게 준 사랑이든, 주고받은 사랑은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우리 몸 어딘가에 잠복해있다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백기사처럼 나타나 도움을 준다.


비단 나만 그랬던 건 아닌 듯하다. ‘다큐 3일’의 VJ였고 지금은 ‘유퀴즈’ 디렉터인 박지현 씨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녀도 초짜인 시절, 자기도 자기를 믿지 못할 때, 누군가 큰 프로젝트를 맡겼다고 한다. 기회라 생각해서 맡았지만, 일을 진행할수록 ‘내가 정말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의심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그때 프로젝트를 맡긴 책임자로부터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었고 그 덕분에 끝까지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이 경험을 <참 괜찮은 태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운 아닐까.”


새해 들어 아내와 함께 독감으로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수액을 3번이나 맞아도, 좀처럼 기침과 콧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땅으로 푹 꺼지는 들의 연속이었다. 그때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고, 믿음으로 격려해 준 분들이 떠오른 건 우연이었을까? 그분들이 보내준 사랑의 눈빛과 믿음의 말들을 이불 삼아 덮을 때,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서로 불신하는 시대, 틈을 보이면 찔리는 살벌한 시대, 능력이 있어야 대우받는 차가운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사랑은 참 지치지도 않고 우리 안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고, 끝까지 믿어주려고 했다면, 아마도 그분들 덕분일 것이다. 정신없이 하루를 살다 보면, 그 사랑이 어디 갔는지 모르고 살 때도 많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고비를 만났을 때, 속이 상할 때, 나조차 나를 의심하게 될 때,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때 다시 ‘짜잔!’하고 나타나 나를 붙들어 주리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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