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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ibooks Jan 18. 2022

모티프원에서의 하룻밤

혼자 여행하다가 영상작업 한 이야기 (1)

작년 11월 어느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집이 아닌 곳에서 고요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



숙소를 물색하고 우연히 찾게 된 곳은 파주에 위치한 모티프원이라는 북스테이였다.

서울살이 중이라 파주가 딱히 멀거나 낯설지는 않지만 대중교통으로 홀로 하루 묵고 오는 짧은 여행에는 적당할 것 같았다.


둘러본 그곳에는 각 방마다 책이 많았고

거실처럼 사람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한 서재에도 책이 가득한 책장이 몇 개나 있었다.

하룻밤만에 책을 어차피 많이 읽을 수도 없고

주변도 둘러보고 밥도 먹고 하려면

그 서재에서 어차피 책을 읽을 일은 없을 테고 괜히 다른 분들과 마주할 이유도 없으니 거의 방콕이겠구나 생각하면서 어쨌든 그 깨끗하고 조용해 보이는 모티프원의 방 하나를 어렵사리 예약하였다.

한창 노란 잎이던 은행나무 아래서 버스를 탔다. 파주를 향하는 그 버스 안에서 한강 하류의 풍경을 보았다.

사실 그 얼마 전에 파주에 갔다가 서울로 들어오던 길에 이 한강 하류의 갯벌이 햇빛에 빛나는 풍경을 보고 마음 담았던 기억이 있다. 그걸 아신 걸까. 모티프원 사장님께서는 예약 확인 문자에 그 풍경을 보라는 당부를 적어 주셨었다. 그날, 그 길에서 앞으로 어떤 작업들을 할지, 갑자기 많은 계획과 생각이 떠올랐다. 왠지 그간 미뤄온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 그런 기분은 오랜만이라 기쁜 마음이 생겨났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전에도 구경 왔던 헤이리였지만 모든 것이 낯선 여행자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낯설었고, 조금은 익숙했던 개천이 보였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서는 지도를 보며 더듬더듬 길을 찾아야 했다.


주변에 수풀과 나무가 가득하던 모티프원에 도착했다.

금속으로 되어 묵직해 보여 문이 잘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잘 열렸다. 들어왔다는 신고를 하고 방에서 짐을 풀고 마음에 들어 사진도 좀 찍고 한숨 돌린 다음, 물을 뜨러 서재 겸 주방으로 나갔는데 사장님과 사모님 두 분께서 무거운 상자를 2층으로 옮기려 하고 계셨다.

두 분이 나누시는 말소리가 살짝 들려 본의 아니게 알게 되었지만 외국의 자녀분이 보낸 짐이라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담겨있고 무게가 꽤 나가는 커다란 상자는 먼길을 와서 한쪽이 살짝 터져있었다.


나도 이런 짐 아는데...

참 오랜만에 보는 상자였다. 체코에서 보낸 상자를 저렇게 서울 집에서 받아보곤 했다. 내가 받을 때도 있고 어머니가 받을 때도 있고 그랬을 상자. 온전히 오는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체코로 보내는 상자도 터지거나 세관에서 걸리거나 하기 일쑤였다.

두 분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도와드릴까요?라는 말이 나왔지만 괜찮다고 하셨다.


저녁거리를 준비할 겸 밖에 나가서 헤이리 구경을 했다. 고양이가 유독 많았고, 돌아다니거나 산책하다 힘들면 앉아서 쉴 공간도 있어 좋았다.

특이한 건물들이 책장에 꽂힌 책들처럼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몇 시간 산책을 하고 들어와 모티프원으로 돌아와 물을 뜨러 다시 서재로 나갔는데

이번에는 두 분이 각자 다른 책상에 앉아 계셨다.

일의 마감이 급해 밤을 새우셨다는 사장님과 이를 살짝 나무라시는 듯한 사모님의 모습이 사이좋아 보였다.

위층과 옥상으로 올라가면 다른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보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셔서 잠시 혼자 올라갔다가 멋진 풍경, 차가운 공기, 새소리를 감상했다.

옥상을 내려오는데 사모님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옥상 문이 가끔 혼자 잠길 때가 있다며, 바깥에 갇힐까 봐 배려해 주신 것이라 너무나 감사했다.


방에서 책을 읽으며 남은 저녁시간을 보냈다.

단순한 검색으로 숙소를 찾은 나는, 모티프원 사장님이 유명 작가이신 줄은 몰랐고 헤이리 촌장을 지내셨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후로는 사장님이 아닌 작가님으로 호칭을 통일할 것이다.)


그날 저녁, 방에서 읽은 이안수 작가님의 [여행자의 하룻밤]이라는 책에는 작가님이 모티프원을 운영하며 만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있었다.

목차를 쓱 보다가 스님의 재활용 명함이라는 페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나도 예전에 재활용 명함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나중에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 명함을 다시 파긴 했지만. 사실 요즘의 나는 명함을 그렇게 많이 쓰게 되지 않는다. 이 스님은 어떤 이유로 재활용 명함을 만드셨는지 읽다가, 다음 장, 또 다음 장으로 넘어가다 보니 어느새 맨 앞으로 가서 그 책을 모조리 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을 청한 뒤,

다음 날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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