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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Jul 22. 2021

후지여관엔 지박령이 산다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1



  소파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동양인의 외모를 가진 그는 마른 체격에 안경을 쓰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만화책에 몰두해 있었다. 한쪽 무릎을 접어 올려 겨드랑이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여행자로 후지여관에 온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언제 도착했는지 언제 떠날 것인지를 잊어버린 채 이곳의 지박령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분명했다. 장기여행자 중에는 숙소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무상으로 묵는 여행자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그는 직원이 아니었다. 그가 직원이었다면, 우리가 후지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맞이해주어야 했지만 그는 그저 만화책을 볼 뿐이었다. 같은 페이지를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심지어는 내가 유령을 보는 게 아닐까 싶어, 해맑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기 저 사람 보이지?"


  "어. 뭐지? 이 집 아들인가?"


  후지여관의 사장님은 노부부였는데, 남편은 일본인이고 아내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정말 노부부의 아들인 걸까? 장기여행자인 걸까? 아들이든 장기여행자든 이 시간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만화책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러웠다.






후지여관의 식탁 풍경



  낮 12시가 넘어 도착한 후지여관은 더없이 조용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시계바늘이 지나가는 소리만이 귓가에 똑똑, 떨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사장님 부부가 도착했다. 여사장님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장을 봐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것이 첫 인사였다. 격한 환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뚝뚝한 인사도 아니었다. 무심한 듯 편안하게 건넨 친근한 인사였다. 며칠 만에 듣는 한국어라 왠지 더 그렇게 들렸던 걸까. 장을 봐 오는 엄마를 마주한 마냥, 우리는 왠지 모를 마음이 놓였다.


  모든 남미의 숙박업소들이  그러하듯이, 인터넷이   되는 남미에서 미리 예약을 하기는 쉽지 않다. 예약메일을 넣어도 하루 이틀은 차분히 기다려야  메일을 받을  있고, 카톡도 한마디 한마디를 주고받는데 10분씩 걸리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라,  마을에서 숙소를 구하느라 돌아다닐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랬다간 숙소를 구하느라 하루를  써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일정의 모든 숙소를 정해두고 가야했다.


  후지여관 역시 예약하기가 퍽 난감했다. 후지여관 홈페이지에도 안내가 나와 있듯이,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공항이나 터미널에 도착해서 후지여관에 빈 방이 있는지 전화를 해 보거나, 아니면 직접 후지여관까지 가서 빈 방이 있는지 체크해보는 듯 했다. 방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방이 없다면 낭패다. 기껏 엘 칼라파테까지 갔는데 숙소를 구하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떠나야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후지여관에 미리 메일을 보냈다. 답장을 못 받으면 할 수 없이 공항에서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후지여관에서 답 메일이 왔고, 운이 좋게도 2인실이 있으니 그날 오라는 메일이었다. 바릴로체에서도 제일 좋은 숙소에서 묵고, 엘 칼라파테에서도 제일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다니! 우리는 진짜 운이 좋다.



  우리가 안내받은 2인실은 차고와 붙어 있는 방이었다. 더블침대와 캐리어를 놓을 수 있을 만큼의 공간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이곳도 역시 시설이 엄청 깨끗하다거나 최신식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베드버그가 없고 개인 화장실이 같이 있는 2인실이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히 행복했다.





분명 샌드위치를 샀는데 정체 모를 고기, 햄, 치즈 폭탄 음식이 들어 있었다. 컵라면이 없었다면 울었을지도 모를 저녁.



  후지여관엔 저녁 늦게야 다시 들어왔다. 투어를 끝내고 저녁을 해결하지 못한 채 숙소로 들어오다, 우연히 발견한 동네 샌드위치 가게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들고 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아사도를 먹고 싶었지만, 근처에 아사도 레스토랑이 보이지 않았고 시간도 너무 늦은데다 피곤했기 때문에 저녁은 간단히 넘기기로 했다. 한국에서 미리 챙겨온 컵라면이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오늘의 저녁은 충분했다.


  후지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낮에 본 그 남자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포즈로, 만화책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로 그는 어떤 사람일까. 한국인일까, 일본인일까. 후지여관은 주로 한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만 찾는 곳이어서 분명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말을 붙이기란 쉽지 않았다.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오로라가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그곳에 있는 사람일까? 우리 눈에만 보이는 환영 같은 건 아닐까? 우리가 들어 온 이후로 한국인 여자 두 명이 체크인을 했고, 한국인 남자 한 명이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고립. 나는 완벽히 그가 부러웠다.






  대개 여행을 하면 가장 아깝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돈이야 어느 날은 아껴 썼다가, 어느 날은 더 많이 쓸 수도 있다. 예산을 초과했다 하더라도 신용카드를 쓸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에게 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은 예외 없이 흐른다. 아껴 쓸 수도, 빌려 쓸 수도 없이 지나가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일정에 시간마저 야속하게 흘러버리니, 여행에서는 늘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주로 하나라도 더 보려고,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고 무리를 하게 된다. 나쁘게 말하면 여유가 없다.


  그런데 저 사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반대편까지 와서, 적어도 세 번은 비행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이 마을에, 후지여관까지 와서, 운동복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 하루 온종일 만화책에 빠져 있는 저 사람 말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이, 그는 그렇게 밤이 늦도록 만화책을 읽었다.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만화책을! 어쩌면 집에 돌아가, 어느 날 무료한 일요일에 읽어도 될 법한 만화책을.


  "저 사람 진짜 부럽다. 시간을 저렇게 쓸 수 있다는 게 정말 부러워."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가 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후지여관 소파에 파묻혀 만화책이나 보고 싶었다. 겨우 세수만 하고, 잠옷 바람 그대로 소파에 앉아서 ‘오늘은 어디 나가기도 귀찮네’하며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만화책을 하나 꺼내서 읽고 싶었다. 빙하투어도, 동네 산책도, 맛집도 다 둘러봐서 할 게 없다는 기분으로. 이 마을 정말 따분하네, 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만화책에 쏟을 수 있는 그의 여유가 부러웠다. 여행을 하면서 시간을 사치하는 기분. 언제 느껴볼 수 있을까. 아마도 30대가 되어버린 이후에는 힘들 것이다. 아이를 키우게 되면 더더욱 그렇겠지. 아이가 스무 살이 된 이후에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돈은 없고 가진 것이라곤 시간뿐이던 20대에 그런 여행을 하지 못했던 게 또 한 번 아쉬울 뿐이다.


  언젠가 만약에 당신이 아무런 일정 없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여행을 하게 된다면, 부디 후지여관을 조심하길 바란다.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은, 시간도 공간도 잃어버린 채, 저 남자처럼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만화책에 푹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후지여관은 그러기에 너무나, 너무나 완벽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멀리 호수가 내다보이는 창밖으론 길고양이들이 제 집 마당인 듯 뛰어다니고, 그 창문으로 은은하게 햇빛이 들어오고, 창문을 바라보는 자리에 소파가 있고, 소파 옆으론 만화책이 한가득 꽂혀 있는 곳. 가끔 주인아저씨가 기분이 좋은 밤에는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는 곳.


엉덩이가 슬그머니 무거워지기에
딱 좋은 곳이다.








후지여관엔 이렇게 예쁜 길고양이들이 산다.




  후지여관이 인기가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조촐하지만 한식으로 된 조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달 두달씩 장기여행자들에게는 남미에서 한식을 먹기란 하늘의 별따기. 특히나 김치 맛이 아주아주 그리울 텐데, 후지여관은 그런 입맛을 달래기 아주 좋은 곳이다.






현재, 후지여관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8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하는데, 새로 이사한 곳은 어떤 분위기일지 짐작 가는 후기가 몇 보인다. 다녀온 사람들 모두 ‘역시 잘 다녀왔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으니, 여전히 편안한 분위기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새로운 후지여관에 가 보고 싶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에 다시 가야할 이유가 하나씩 더 늘어난다.


후지여관을 예약하고 싶다면 카카오톡으로 연락하면 된다. 카톡아이디는 fujicalaf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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