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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Dec 28. 2019

어김없이 쌓여간다, 오늘의 소리들이.


시작인지 끝인지, 속해있지 않은 외부인은 알 수 없는 종소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클래식의 일부분만을 따온 멜로디였다. 지루함의 시작을 알리고, 기쁨의 시작을 알리는 멜로디였다.      


겨울이 오기 전, 적당히 차가운 바람과 아직 떨어지지 않은 노랗게 물든 나뭇잎과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날이면, 나는 몸을 움직였다. 더 추워지면 산책하기가 더 힘들어질 거야. 점심시간 60분을 최대한 알차고 공평하게 쓰고 싶었다. 30분은 밥 먹는 데에, 30분은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맡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는, 인도보다 높이 위치한 학교였다. 아이들이 딛는 땅이 내 허리춤에 있는 학교였다. 낮게 설치된 담장은 내 키를 뛰어넘었고, 그 높은 곳을 휘-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익숙한 멜로디가 내게 머물렀다. 너도 이런 종소리를 듣지 않았었니, 하고. 네 기억의 수많은 시작점 중, 어느 한 점은 종소리지 않니. 하고.           



여자중학교였다. 매점을 향해 우다다다 뛰는 소리가 교시마다 태어나는 곳이었고, 그 소리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익숙한 멜로디가 있었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스스로 뿜어내는, 그렇게라도 뛰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열네다섯의 명랑한, 비글 같은 아이들이었다. 여러 개의 계단을 펄쩍펄쩍 뛰면서 내려오는 아이들 속에, 겁이 많아 계단 손잡이를 꼭 잡고 한 계단씩만 뛰듯이 내려오는 내가 있었다.      


아마 내가 선생님이었다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마다, 그 종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학교 전체가 울리는 듯한 엄청난 활기참을, 아이들의 에너지를 미처 견뎌내지 못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디를 가나 시끌시끌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학년의 시작과 끝은 종소리에 있었다. 학교는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듯이 들썩들썩했다.      





다음 단계의 학교에 가니 누구도 매점을 가기 위해 뛰어다니지 않았다. 이제야 다들 차분히 삶을 살아가나보다, 주민등록증을 가진 의젓한 어른이라고 그런가보다, 했다.

어쩌면 가슴 품에 안고 다니는 전공 책의 무게에 주눅 들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전공 책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고민이 그들의 엄청난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한참 후에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소리는 조금 독특했다. 제법 인상 깊은 특이한 소리가 봄의 시작을 알렸다.      


수강 정원은 분명 두 자릿수였다. 애초에 세 자리로 넘어가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강 신청 기간이 지나고 수강 정정 기간까지 끝난 후, 최종 수강인원은 120명이 다되어 있었다. 

정정 기간에 진행된 수업이 끝날 때마다 강단 주변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상대평가였기에 누군가는 학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꿋꿋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출석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길 원했다. 졸업을 앞두고 모자란 학점을 채워야 하는 선배부터, 꼭 듣고 싶었지만 클릭이 늦어 마감되어버렸다는 학우까지. 각자의 절절한 사연이 교수님의 펜을 움직였다.       


마음 약한 교수님은 출석부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 자신에게 전달된 사연을 빠짐없이 수용하고자 했다. 모두의 간절함을 보듬고자 했던 교수님의 정성으로, 강의실이 변경되는 수고로움까지 감수했던 모두의 배려로, 애초에 계획된 두 자릿수보다 많은 인원이 함께 가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교수님에겐 낯선 일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인기가 좋았던 수업이었던지라, 항상 많은 인원이 수업을 들었고, 몇 해가 반복되면서 나름의 노하우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바로 출섹 체크였다. 교수님의 성향에 따라 30명 내외의 수업도 출석 체크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교수님은 수업 시간 마다 그 많은 인원을 짚으셨던 것이다.     


언제 그 많은 이름을 부르시려나, 했지만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의 대답은 스타카토처럼 짧게 탁탁, 치듯이 들렸고 교수님의 목소리는 ‘속사포 랩’처럼 순식간에 이름을 훑어 내려갔다. 대체 교수님은 어느 포인트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끊어치듯 짧은 '네' 대답을 놓치지 않는 예민한 청각까지 소유한 분이었다.      


교수님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학우들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던 내 이름이, 그렇게 모두의 이름이, 강의실을 가득 채운 채로 75분이 흘러갔다. 

그렇게 봄에 시작된 120명 학우의 이름들은 여름이 시작될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봄의 시작과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의 소리였다.           




한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여행사에 입사했다. 한참 유럽이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였고 덕분에 바쁜 사무실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귀에 꽂혔다.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허니문을 준비하며 달콤한 꿈을 품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 가는 가족여행에 설렘과 걱정을 보내왔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소리를 질러댔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본인 회사의 직원 부리듯 대하기도 했다. 들어도 괜찮은 사연과 들으면 괜찮지 않은 사연이 분별없이 수화기로 흘러들어 왔다.      


괜찮지 않은 사연은 전화기에 대고 한껏 목청을 높여대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가 일 년에 꼭 세 네 번씩, 잊을 만 하면 나를 찾아와 큰 상처를 남겼다. 결국엔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는 둥, 너무 화가 나서 그랬다는 둥, 아무런 위로도 공감도 되지 않는 의 미없는 말들만 허공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결국 높은 사람을 찾는 거로 끝을 봤던 그런 전화는 나에게서 팀장급으로 넘어가곤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말씀을 하셔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지 않겠냐고 차분히 말하던 여자 팀장님의 강단 있는 목소리와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멋있어 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팀장이라는 직급의 무게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나도 우리 팀장님처럼 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하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내던 내가 있었다. 다행히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비슷하게 따라 하는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는 나도 있었다.           




어느새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보다, 내게 들려오는 소리가 더 오래도록 살아남는 날들이 많아졌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 흘러들어온 소리는, 그렇게 나를 우울함으로 옭아매기도 하고 반대로 행복함으로 한껏 날게 해주었다.      



어찌 되었건, 삶을 가득 채운 소리는 오늘도 쌓이고, 내일도 쌓여 가겠지. 그러다가 맨 밑층에 짓눌리듯이 깔린 얇은 단층의 기억을 조심스레 만지며 툭,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아 그땐 정말 좋았었지, 혹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야, 라는 말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쌓이지 않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선별의 기준은 좋은 쪽이든 그렇지 못한 쪽이든,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라서, 사실은 마구 뒤엉킨 채로 대중없이 쌓이는 퇴적물과 비슷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쌓여간다. 2019년 12월 28일, 오늘의 소리들이. 차곡차곡, 층층이. 

결국엔 그 퇴적물이 내가 지나온 나의 흔적이었음을 자연스레 깨달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찬찬히 어루만져 줄 거야. 어지럽게 뭉쳐있는 나의 기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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