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일, 든든하게 의지했던 사람이 뒤돌아서는 일, 내가 믿고 살았던 별과도 같은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일.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주인공 '나탈리'는 무겁고, 벅찬 일들을 한 번에 마주하게 된다. 함께 철학을 가르치며, 영원히 사랑하리라 믿었던 남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고, 남편과 이혼을 준비한다. 자신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던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고, 그곳에서 엄마는 세상을 떠난다. 가르침으로 낳고, 기른 아들 같던 제자로부터 선생님은 삶과 앎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는다.
'나탈리'가 겪는 일들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일이다. 사랑하는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영원히 곁에 머무를 것 같았던 남편은 다른 여인과 함께 살 준비를 하고, 자식들은 모두 커서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이야기한다. '완전한 자유'는 어쩌면, '온전한 고독'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삶은 고독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온전하게' 고독하게 된다면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나탈리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이겨나갈까?'라는 생각과 나약한 고민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탈리는 그 일들을 마주하고, 견뎌낸다. '이겨내는' 것이 아닌 '견뎌'낸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녀의 무장한 씩씩함과 눈물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씩씩하게, 지적인 양분으로 이 시간들을 이겨내고 있는 그녀 같지만, 이 어색하고 참담한 고독의 시간에서 그녀는 밤이 되면 울부짖는다.
이 시간들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난 나탈리는 철학 수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 - 알랭의 행복론 중에서' -
행복을 갈망하고,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행복이 찾아온 뒤에 우리는 그 전보다 조금 덜 행복하다. 행복은 아이스크림과도 같아서, 순간적으로 달콤할지는 몰라도, 그 달콤한은 금방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잠시도 행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랭'의 행복론에서처럼 우리는 행복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행복을 꿈꾸고, 다가가며 행복하다.
어두운 창고에서 긴 시간 동안 싹을 피워낸 감자를 보고, 생의 경이로움을 느꼈던 어느 심리학자처럼, 우리 삶은 희망을 원동력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나탈리'의 이야기는 '탄력성'과 이어질지도 모른다. '탄력성'은 심각한 삶의 국면에서 좌절하지 않고 기존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재기할 수 있는 개인의 고유한 성질이다. 사람마다 '탄력성'을 갖게 하는 것들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탄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소유'일 수도, '가족'일 수도, '여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힘을 갖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나탈리'처럼 내가 온전하게 '심각한 삶의 국면'을 마주할 수 있는 힘과 그 시간을 이겨내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마주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삶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 '타인의 자유를 간섭할 수 없다.', '나의 행동은 내가 책임진다.'와 같은 차갑지만 당연한 진리들. '마주하기'에 너무 아픈 것들을 잘 '마주'해야 다가오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
마음의 성숙을 길러내는 것이 그 방법일지도 모르기에, 내 마음의 성장을 조금 더 재촉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