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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작가 Dec 12. 2019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같이 밥만 잘 먹습니다.

회사 안 가고 동유럽 가기-4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을 가기 전에 필수로 거쳐가는 곳이 네이버 카페 '유랑'이다. 여긴 유럽 여행의 모-든 정보가 있다. 유럽 여행에 관한 시행착오를 겪어온 사람들의 질의응답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보를 여기서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는 '동행'이라는 게시판이 있는데, 각자 일정에 맞춰 그날그날 함께할 친구를 구한다. 예를 들어 '오늘 비엔나에서 저녁 드실 분!' 이런 식이다.

 나 역시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 게시판을 이용하리라고 마음먹었고, 비엔나에 머문 지 삼일 째에 처음으로 동행을 구했다. 오스트리아의 서쪽에 위치한 잘츠부르크를 다녀온 날이었다. 기차를 타고 갔다 왔는데, 서울에서 전주 정도까지는 되는 거리여서 꽤 고단했지만 이날만큼은 유럽의 저녁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다. 카페의 동행 게시판을 뒤졌다.

 



잘츠부르크의 오후.




 전날 밤에 오페라 하우스는 혼자 봤지만 누군가와 같이 보는 야경은 또 다른 것이니까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 모였다. 우린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줬다.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내 사진을 맡기는 것이 조금 어색해서 찍사 역할만 하고 있는데,

'진짜 안 찍으셔도 괜찮아요?' 하길래

'아, 네. 괜찮아요!' 했는데,

'그래도 한 장 찍으세요!' 하셔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유럽에서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멀쩡한(?) 사진이 되었다.



인스타에도 안 올린 걸 여기에 올려본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인생 샷 만들어주기'라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서 그런지 다른 대화 없이도 즐겁게 목표 달성을 위해 단합했다. 오페라 하우스를 내려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비엔나에서 유명한 <립스 오브 비엔나>라는 가게로 갔다. 예약제로 유명한 곳이었다. 역시나 자리가 없다며 퇴짜를 맞았다. 얼른 구글을 열었다. 그 근처 200m 반경에 있는, 적어도 밤 열한 시 까지는 하는 가게를 찾았다. 꽤 많은 가게들이 밤 열 시 정도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은 아홉 시에 다다르고 있었다. 찾아서 들어간 곳은 운 좋게도 립스오브비엔나보다 훨씬 여유롭고 포근한 분위기의 가게였다. 아직 10월 중순이지만 뭔가 크리스마스를 연상하게 했다. 서버의 어투와 제스처가 굉장히 크고 역동적이었는데, 친절함이 우리나라 사람과는 다른 결이었다. 조금 낯설었지만 좋은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첫 동행하던 그 날.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행자 다운 대화를 나눴다. 비엔나에는 언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총 여행 기간을 며칠인지, 숙소는 어딘지, 지금은 학생인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온 건지, 슈니첼은 여기가 맛있는지 잘츠부르크가 맛있는지, 뭐 그런 대화였다. 자연스럽게 나이를 물어보기도 했고, 이름과 사람을 매칭 하기도 했지만 우린 그날 밤에 헤어진 뒤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매칭한 이름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동행한 분 중 한 명이 우연히 같은 숙소여서 다음 날 새로운 분들과 한 번 더 점심을 먹긴 했지만 그것도 그게 다였다.

 그 후에도 저녁에 두어 번의 동행을 더 했지만 그때마다 이름을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자 한국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 얘기하다 보면 나이를 묻기도 했지만, 밥만 먹으면서 존댓말로 대화하다가 헤어질 사이에 나이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잘 맞으면 여러 번 동행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인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비엔나의 밤. 혼자는 조금 무서워서 동행이 있을 때 밤에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 동행했을 때는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정확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그 목적만 달성하면 원래 몰랐던 사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정말 쿨하다. 그렇지만 타지에서 '한국인'이라는 동질감으로 뭉친 사이라 그런지 그 순간만큼은 꽤 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행 이야기로도 함께하는 시간이 충분히 채워진다.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이름과 나이는 무엇인지, 사는 곳이나 고향은 어딘지, 형제는 누가 있는지, 남자 친구,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등 진짜 대화에는 전혀 도움도 안 되는 정보들을 주고받는 것을 으레 인사치레로 여긴다. 이런 대화가 아예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때에 따라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살다 보니 그냥 얻어진 것들을 아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여행지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를 듣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냥 한 번 넣어본 잘츠부르크 사진.



그들이 여행했던 나라 중 가장 좋았던 나라는 어디였는지, 음식은 어땠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등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만나볼 수 없던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동행의 매력이었다. 프라하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고, 유럽답게 한 달 이상 여행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었고,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미의 나라 한 곳이 유럽 전체보다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미가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동행하지 않았다면 영영 모를 일이었다. 그건 오히려 이력서를 뽑아낸 듯한 인적 사항을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대화다웠다. 동행한 사람들과 깊이 있는 관계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비엔나와 프라하에서의 밤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첫 유럽 여행에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만으로도 '동행(同行) :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 가진 의미는 다했다. 그리고 난 그 의미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혼자 있으면 한국인지 유럽인지도 모를 사진이 핸드폰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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