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하기 전에 동유럽 날씨가 상당히 변덕이었다. 10월 중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하를 웃돌았다. 그래서 옷을 뭘 가져가야 될지 참 고민이었다. 유럽 여행 카페 유랑에서는 유럽에 있는 사람들이 날씨를 실시간으로 공유해주기도 했었는데, 그 게시판을 매일 들락 거리면서 날씨를 확인했었다. 일단 추워서 덜덜 떠는 것보다는 약간 귀찮더라도 겉옷을 손에 드는 게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좀 따뜻한 옷 위주로 챙겼더랬다. 다행히 내가 비엔나에 도착한 날부터는 영상권으로 올라오고 모두 평년 기온을 찾았었다. 그래서 바람대로(?) 낮엔 겉옷을 손에 들었고 밤에는 입은 채가 딱 적당했다. 다만 서늘해지면 손발이 먼저 알아버리는 신체 구조 탓에, 몸은 춥지 않아도 한국에서 챙겨간 핫팩을 매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손의 체온을 유지했다.
안개 껴도 멋진 비엔나.
아침에 종종 안개가 끼거나 흐린 날이 있기도 했지만,
빨간 트램이 너무 예쁘다. 유럽 처음 가 본 사람들은 끝없이 찍는다는 트램. 그게 바로 나~
'날씨 요정'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게 당연할 만큼 낮만 됐다 하면 하얀 구름이 낀 파란 하늘이 반겼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카페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거나, 타닥타닥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다. 나도 그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일생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프라하에서 비 오는 풍경을 마주하는 것도 꽤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했지만, 다소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선선한 가을 날씨만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꽤, 많이 매력적인 일이기는 했다.
어느 맑은 날. 동행과 약속이 있어서 프라터 공원을 향했다. 그 날 맥주 축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 거주자로서 송도의 맥주 축제는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언제 또 오스트리아의 맥주 축제에 가 볼 수 있겠는가. 로컬 축제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겠지만 안 어색해 보이는 척 맥주를 마시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프라터 역에 도착해서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맥주 축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풍경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단연코 내가 본 해 질 녘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참 공원 분위기 심취해 있다 보니 본분이 생각났다. 동행을 만나야 했다. 생각보다 맥주 축제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원 입구를 지나 거의 끝자락 안 쪽에 위치해 있었다. 들어갈 때 가방 안에 맥주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사했다. 가방 안을 봤으니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나름 우여곡절 끝에 동행을 만났다. 원래는 여럿이 모이기로 했었지만 다들 약속을 취소한 탓에 둘만 먼저 만났다. 사실 나도 약속했던 시간보다 꽤 늦은 터라, 정시에 도착한 동행에게 많이 미안했다.
물론 맥주 축제 안도 예뻤다.
가장자리에 푸드 트럭을 쭉 설치해 놓고 진행하는 우리나라 축제와는 달리, 이곳은 마치 하나의 마을 같이 만들어 놨다. 공연하거나 신나게 노는 분위기의 가게가 안에 따로 있었고, 저렇게 작고 예쁜 가게를 곳곳에 만들어서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이 축제는 오후 여섯 시 반까지였던 것이다. 여섯 시 반에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이건 말도 안 되는 공식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밤새도록 운영하는 편의점도 거의 없고, 일요일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유럽 아닌가. 대략 오후 여섯 시쯤에 동행과 만났던 터라, 이 축제에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추워져서 들어갔던 프라터 공원 안의 펍.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지는 못 했지만 펍으로 들어가서 동행들과 늦은 식사를 했다. 늘 그렇듯 각자 여행담을 이야기하고, 한국에서는 뭘 하고 지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늘 계획하지 않은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어쩌다 마주친 해 질 녘의 프라터 공원은 평생 잊지 못할, 우연하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자리 잡았다. 크지 않은 부지에 오밀조밀 놀이 기구가 모여있고, 반짝반짝하고 화려한 조명이 수놓아진, 놀이 공원 특유의 설렘이 가득한 곳이었다.
놀이 기구를 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안내 방송 소리, 사람들의 흥을 돋우려는 각 기구의 다른 음악 소리가 한 데 섞여 화음을 만들어냈다. 해가 질 때는 오묘한 주황색이 됐고, 완전히 지기 전에는 보라색도 아닌 푸른 색도 아닌 하늘은 아름다운 광경에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낙조는 살면서 수천번을 봤으니 짧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는 공식이었지만, space bar를 눌러서 정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비록 '어색하지만 안 어색한 척 맥주 마시기' 미션은 실패했지만 이날 만났던 동행 중 한 명은 지금도 유일하게 연락하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10월 어느 날, 다시는 오지 않을 보랏빛으로 물든 오스트리아의 프라터 공원에서 같은시간을 공유했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