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5일 차. 프라하에 간다면 누구든 간다는 체스키 당일치기를 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세 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했다. 아침은 좀 흐려서 그런지 약간 쌀쌀했다. 일단 한적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직 실내는 안 된다고 해서 바깥에 앉았다. 다소 추웠다. 목살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조금 뻑뻑했지만 먹을만했다. 차가운 날씨 탓에 빠르게 식어버린 것만 빼면 말이다.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찾아간 곳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식사 도중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나타났다. 얼른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버를 불러 계산서를 부탁했다. 이상하게도, 외국인만 있을 때보다 같은 한국인이 주변에 있을 때 오히려 서툰 영어로 말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바로 옆에 한국인 커플 관광객이 있어서 그랬는지 평소보다 더 위축된 느낌의 어투로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 또한 지나갈 첫 유럽 여행의 관문 이리라.
다음 목적지는 카페였다. 체스키는 아주 작은 도시지만, 전체가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였다. 구글 지도를 켜서 최대한 사람이 없다는 카페를 찾았다. 얼죽아 회원이지만 이날만큼은 다른 커피 감성이 필요했다. 라떼와 케익을 주문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핫하다는 성수동이나 을지로에 있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합정 어딘가에 작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엄마와 보이스톡으로 한참 통화를 하다 보니 오후가 돼가고 있었다. 어디 카페에 있든 가끔씩 통화를 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뱉어졌다. 그렇다고 뭐 알아들으면 안 될만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타국에서 내뱉는 한국어에 대한 편안함, 뭐 그런 것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점점 날이 갰다. 창가로 빛이 들기 시작했다.
슬슬 걸어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기로 결심했다. 여행 며칠이 지나도, 혼자서 시간을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했다. 먼저 체스키 성에 가야 했다. 눈치 게임에 성공한 것인지 운 좋게도 관광객이 거의 없을 때 둘러볼 수 있었다.
실물로 봤을 때 컴퓨터 배경화면 같았다.
조경이 잘 돼있는 공원도 둘러보고, 높은 곳에서 아기자기한 체스키 마을도 한눈에 들여다 보고, 호숫가에 가서 숲이 하는 이야기에 귀도 기울이다 보니 오후 네시쯤 되었다.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다. 할 게 없어진 느낌이었다. 밥도 먹었고 카페도 갔고, 유명한 곳도 둘러보았는데. 이제 뭘 하지? 의외의 난관이었다. 프라하로 돌아가는 버스는 오후 여섯 시 반에 예매해 놓은 상태였다. 지루했다. 어쨌든 그 시간을 뭔가로 채워야 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가 힘들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벤치에 앉았다. 검색해보니 에곤 쉴레 미술관이 있었다. 물론 미술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를 갔다'는 생산적 활동이 필요했다. 그래야 이 지루함이 줄어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버스 시간에 맞춰 정류장으로 갔다. 지도가 이상한 건지 내가 잘 못 찾은 건지 주변을 다섯 번 정도 뱅뱅 돌다가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조금 지쳐가고 있었다. 어쩐지 이 날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지루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날이었다. 동화 마을이라고 유명한 이 곳의 감동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참 모순이었다. 일상을 벗어버리고자 찾은 여행지에서 또 다른 모양의 지루함을 마주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런데 체스키에서의 하루가 지루했다고 이 여행이 내 것이 아닌 건 아니었다. 그 지루함도 여행의 한 부분이었다. 그냥 그런 하루가 있었지. 하고 내버려 두고 여행의 한 조각으로 장식해두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사는 것도 그랬다. 삶은 늘 권태로울 수 있다고 받아들이고, 불현듯 찾아오는 순간의 행복을 맞이할 마음을 갖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다. 물론, 잘 안된다. 지금도 잘 안되고, 앞으로도 잘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만, 야근 후 택시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반갑고, 금요일 밤에 맛있는 음식이랑 맥주 한 잔 하면서 이 맛에 돈 버나보다 하고, 환승해야 하는 지하철이 오차 없이 딱 맞게 나타나 주는 것에도 쉽게 기분이 들뜨고, 핸드폰만 보고 있다가 창 밖의 노을을 마주치면 스스로에게 '오늘도 수고했어.' 위로하며 노을빛에 마음을 적시곤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우린 찰나의 행복함을 위해 하루의 절반 이상을 권태와 싸운다. 아니 어쩌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겠지. 문득, 체스키에서 못 먹고 온 뜨르들로 빵이 생각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