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
펌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모시던 보스는 꽤나 수임을 잘 하시던 분이었는데 그의 밑에 고용된 고용변호사, 속칭 어쏘들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나이가 꽤 많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별명은 하얗게 새버린 머리칼 탓이리라. 아마도. 무엇보다 머리 한가운데가 태양의 거대한 흑점처럼 비어 있었다. 판검 출신의 전관에 공공기관 이사장까지 했다지만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늘 뒷짐진 자세, 의뢰인의 말을 들으면 허허 웃기만 할 뿐이고, 그의 방에 있던 PC는 최신형이었지만 키보드에는 항상 두꺼운 먼지만 앉아 있었으며, 심지어 눈이 침침해서 서면마저 보기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할아버지였다. 물론 별명처럼 어쏘들에게 인심 좋은 분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현실은 스크루지였다.
당시 로스쿨을 졸업하신 변호사 두세 분이 할아버지 밑에서 실무수습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분은 모르겠으나 개중 A 변호사님은 일종의 '거마비'조로 이백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다니기로 한 모양이었다. 최저임금법 위반이다. A 변호사님은 참 열심히 했다. 로스쿨 졸업자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변호사법상 6개월의 실무수습 종료 이전에는 재판 출석이 불가능하기에 재판만 안 나갈 뿐, 할아버지의 서면은 A 변호사님이 전부 다 썼다. 심지어 찾아온 손님의 상담까지 했다.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쓰고 '노예'라고 읽는다.
어느 날 제법 큰 클라이언트가 찾아왔다. 며칠 전 방문해 의뢰한 고소장이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수령하러 온 것이었다. 그거 하나 써 달라는 데 OOO만원이었다(그런 호구는 난생 처음이었다). 물론 서면은 A 변호사님이 쓰신 것이었다. A 변호사님이 간략히 브리핑을 마치자 만족한 클라이언트는 할아버지에게 지금 가진 현금이 약소하다며 그 자리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몇 장 건네셨다. 클라이언트가 돌아가자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수고했다'고 말을 건네고 퇴근했다.
다음날 A 변호사님은 할아버지에게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네가 한 게 뭐가 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서초동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노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날 A 변호사님은 잘렸다. 물론 할아버지는 죽지 않았고, A 변호사님도 여전히 서초동에서 잘 일하고 계시다. 고 따위로 말을 하는 자일수록 업계에서 인심이 없는 건 당연지사다.
자세하게 쓰지는 않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서다. 요즘의 서초동은 늘 평범하게 부당하다. 직장인들이 스스로 '파리 목숨'을 운운해대지만 개인 법률사무소에 고용된 변호사야말로 '날파리 오브 날파리'다. 누구든지 금방 대체할 수 있는 사건들만 들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아직도 많은 로펌이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세후 월급으로 지급하는 것도 있고, 굳이 근거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아서다. 아는 놈들이 더해서 문제다. 정말이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전생에 개구리였는지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면 참지 못하는 대표변호사들이 있다.
"김 변호사, 할 일 없으면 파리라도 잡지 그러나?" "예 알겠습니다."
-찰싹
-찰싹
"거참 못 잡네. 김변,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되네."
실화다.
어떤 펌에서는 어쏘 변호사들이 컴퓨터로 무엇을 하는지 대표변호사들이 노트북으로 볼 수 있다. 그 직장 한정으로 대표변호사들은 600만 불의 초인이다. 실시간 도감청이다. 국정원이다. 쓰다보면 정말 거짓말 같다. 사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정말의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