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은 그만, 인격모독도 그만
우리 보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수임도 하지 않고, 서면도 쓰지 않는다. 그놈의 엑셀 시트(Excel, 이하 '엑셀')만 본다. 요즘에야 로O이니 로앤O니 하는 법무관리 프로그램이 널려 있지만 예전에는 무조건 엑셀이었다. 그야말로 원시와 야만의 시대였다.
그 엑셀 파일은 B 변호사님이 처음 만든 것이었다. 가로 한 줄마다 현재 진행 중인 소송(담당 변호사별), 사건별 진행상황(증인 출석, 제출 서면, 증거 등등), 해당 사건을 설명해주는 키워드 몇 개 정도가 있다. 지금은 그 엑셀에 적어야 하는 빈칸이 각 당사자, 상담내용, 일시, 서면의 주요 내용 및 원본 하이퍼링크, 키워드 10개 이상, 고객 불시 내방시 전달해야 하는 부분 등까지 늘어났다. 변호사들은 어떻게 하면 엑셀 시트를 더 자세히 기록할지 아이디어를 하나씩 내와야 한다.
그 액셀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이냐, 대표변호사의 건망증을 치료해주는 역할을 한다.
대표변호사는 하루 종일 엑셀만 쳐다보다가 변론기일이 지났는데 빈 칸이 있으면 무조건 방으로 전화를 한다. 왜 진행상황을 업데이트하지 않았느냐는 이유에서다. 변호사들이 직접 엑셀을 채워 넣는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최소 30분이다. 엑셀을 보면 한눈에 관리가 되니 편하다는 점은 알겠고, 어떤…시스템화에 대한 대표의 야심과 니즈도 알겠다. 그런데 하루 30분씩 꼬박꼬박 하면 한 달에 최소 10시간을 이 엑셀에 쓰게 되는데, 변호사 수에 시간당 타임차지, 거기에 10만원을 곱하면 그 돈으로 제일 비싼 법무 프로그램 수십 개는 돌릴 수 있다. 물론 이 말을 다들 하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다. B 변호사님이 "그걸 직접 말하라"는 어쏘들의 눈총 끝에 지난달에 나갔다.
또 전화가 왔다.
"김 변호사는 서면도 잘 못쓰면서 밥은 엄청 먹는군. 다이어트 안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월급을 올려달라고 하나?"
"우리 펌 애들은 실력이 없어 하나같이. 특히 걔, 이 변호사 말이야(3m 거리에서 전화하며)."
"아 진짜 내가 여기 와서 초등학생 가르치는 것처럼 다 가르쳐야 하나?"
"최악이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면 어떻게 자넬 믿고 일을 맡기나?"
"일 못하면 파리라도 잡게."
"재계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자넨 글 쓰지 말고 박 변호사한테 전부 넘겨."
"인사담당자가 당신을 왜 뽑았는지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자넨 능력이 없어. 절박함도 없어. 대체 뭐가 있나?"
"…(닷새째 일을 주지 않는다)."
욕설은 생략한다.
개인적으로 제일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게 이 인격모독자 유형이다. 중세 이단 심문관처럼 사람을 고문하는데, 원인은 다양하다. 진짜 어쏘변호사의 실력이 없을 수도 있고, 실수를 많이 했을 수도 있다.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펌의 특성상 감수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다만 고용변호사 쪽에만 문제가 있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표변호사의 조급증, 짜증, 강박관념 따위의 성격상 문제가 겹친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보스 밑에서 계속 있다가는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된다. 적응되거나, 그만두거나.
적응된다 하더라도 매일같이 인격모독을 당한 끝에 열 중 두셋은 정신과에 들르는 경우가 생긴다. 정신과에 가는 일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계속된 학대 끝에 당신은 병원에 갈 정도로 마음이 피폐해졌다는 뜻이고, 이 정도에 이르게 되면 이미 당신이 레드 라인에 서 있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대표와 이야기하고 나면 골이 울리다, 뒷머리가 찌릿찌릿하다, 쓸데없이 두통이 이어진다, 매일 울어서 눈이 침침하다, 이럴 정도로 신체가 이상 신호를 보낼 정도라면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변호사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특히 법률사무소, 소형 로펌에서 이런 문제는 일반 회사의 그것보다 더욱 해결하기 어렵다. 회사는 인사팀이라도 있다. 개인이 운영하는 법률사무소나 별산 로펌의 경우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자신의 결단뿐이다. 고용변호사들은 자신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한국은 넓고, 생각보다 당신이 필요한 곳은 많다.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힘내자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