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의 <폭력의 진부함>을 읽고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아야 하는, 알 필요 없고, 조심할 필요도 없는 존재들이 제 얼굴과 이름, 목소리를 드러내면, 너무 많이 보인다고, 너무 말이 많다고, 너무 요란하게 떠든다고 성을 낸다. 그동안 투표권도 주고, 교육의 기회도 ‘평등’하게 주고, 밖에 나가 일도 하게 해 주고, 자유롭게 섹스도 하게 해 주고, 오냐오냐했는데 감사할 줄 모르고 자꾸 더 달라고 덤비냐고, 내가 얼마나 선량한 사람인데 ‘성차별’, ‘성폭력’을 저지른다는 누명을 씌워 내 체면을 깎으려 드냐며 광광 댄다(폭력을 당할까 봐, 죽임을 당할까 봐서가 아니라).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만 용인해주거나 관용을 베풀 수 있을 뿐이다(“거기까지만 하지?”, “알겠는데, 좀 예쁘게 말하지 그래? 그렇게 말하면 들어줄 수가 없잖아.”).
더 나아가 여성 대통령, 흑인 대통령“도” 나오는 세상인데(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상황이 예외적 현상임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 Girls can do anything인데, 차별이 어디 있냐고, 오히려 남자가, 백인이 역차별당하는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더 세련되게, “여성들이 겪는 상황, 소수자들이 겪는 상황을 ‘모든 인간의 문제’ 속에 용해하여 이들이 겪는 구체적인 문제를 흐릿하게 하고 ‘설명할 수 없게’ 만들어서 그들의 삶은 ‘원래’ 그런 것으로 고착시킨다.” 117p 이렇게 공기처럼 일상과 의식구조 곳곳에 스며든, 문화화된 ‘진부해진’ 폭력을 지우려 든다.
어쩌면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시큰둥하게 그냥 ‘몰랐다’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모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왜 모르는가, 왜 몰라도 되었는가, 왜 듣지 못했는가, 왜 보지 못했는가, 생각해야 한다. 평소 여성 앞에서 온갖 아는 척을 하지만 정작 여성이 일상적으로 입는 피해에 대해서는 너무도 깔끔하게 ‘모른다’. 그렇게 모르고도 그토록 많은 말을 하며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이 바로 권력이다. 어떤 종류의 모름은 눈으로 보고도 인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225p (“읭? 권력이라고? 내가 이재용도 아니고 내가 무슨 권력???”).
다음은 문화화된 폭력의 예시이다.
아무도 안 죽인 여성이 ‘재기해’라고만 해도 ‘남성혐오자’로 불릴 정도로 남성혐오의 기준은 낮지만, 아무 여자나 죽인 남성이 ‘여성혐오자’가 되는 기준은 신중하게 정해지는 법이다. 227p
성매수 문화는 여성을 교환하는 성차별의 상징이다.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될 때 이 법이 가난한 남성을 억압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부유한 남성과 가난한 남성 간의 성적 분배가 불공평하기에 성매수를 통해 성적으로 소외된 남성의 성생활을 보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욕망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 뒤, 남성 간의 계급 갈등을 여성을 통해 덮으려 한다. 여기서 여성의 인격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234p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고 조롱하던 이들은 정작 이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게 무엇인지 모른 척한다. 양진호는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142p ‘직원 폭행 동영상’은 폭력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지만 성착취물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지 않는다. 이 두 종류의 영상을 대하는 다른 태도가 바로 이 사회에 감춰진 오래된 폭력이다. 143p
흑인이나 여성, 성소수자 운동을 비판하며 때로 ‘정체성 정치’라는 낙인을 찍는다. ‘일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로 활용하는 이들이 왜 없겠냐만, 이 정체성 정치라는 표현은 매우 교활한 비판 수법이다. 특정 정체성으로만 읽혀지는 존재에 대한 저항의 몸짓을 거꾸로 정체성으로 특권을 누리려는 사람인 양 몰아가며 ‘정체성 정치’라 공격하기 때문이다. 117p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력은 요구 없이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더글러스)”, “가해자들은 조용히 퇴각하지 않는데?(이라영)”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가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얼굴이 있고 이름이 있고 목소리가 있으며 서사가 있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임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목소리 높이는 수밖에 없다. 매우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존재를 감히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성폭력 폭로는 남성의 사생활에 갇힌 여성 개개인이 고립된 기억을 공론장에 꺼내어 정치화하는 운동이다.” 196p ‘제도를 통해 시비를 가리지 않고 여론 재판에 떠넘기는 형식은 나쁘다’, ‘폭로는 위험하다’는 당위, ‘원칙적으로 맞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은 기존의 문화화된 폭력을 지속되게 만든다. 196-197p 사실, “폭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한 뒤, 결국 자신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최후에 선택하는 수단이다.” 274p 인권이 파괴되는 노출을 강요당하거나, 208p 폭력을 ‘당한’ 사람으로서 구경거리가 되기 쉽기에 256p 폭로는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나 끝없이 눈치를 봐가면서 예쁘게 이야기를 해도 목소리는 도달하지 않았다. ‘웃통을 벗고’ 성난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자 이라영은 이 책을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발화를 독려하며 연대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7p 특히 피투성이가 된 피해자만을 폭력의 증거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지극히 평범한 폭력의 얼굴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19p 1부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이 사회의 문화적 폭력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자신 또한 그 문화적 폭력의 한 줄기를 이루는 내용으로 구성했다고 말한다. 11p 우리에게는 불쾌감조차 가질 줄 몰랐던, 혹은 찜찜한 기분은 들지만 좋게 받아들이려 애썼던 폭력의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가? 2부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묵살하기 위한 가짜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부터 말한다”는 선언과 함께 박력있게 시작되는데, 105p ‘개인적’인 사건이 왜 개인적일 수 없는지에 대한 해석이 담겨있다. 12p
수치심을 강요하며 침묵시키는 권력에 대항하여 ‘보이고 들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나의 이름’을 획득하기 위해,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해 발화하는 일은 중요하다. 저자가 언급했듯 인터넷으로 보면 성폭력을 폭로하는 여성들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제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205p 공론의 장에 올라온 용기 있는 목소리들이, 연대를 통해 증폭된 목소리들이 강간문화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수치심이 덜 유발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더 적은 피해 경험은 상대적으로 말할 용기를 내기 쉬우나, 특히 근친 성폭력과 같이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그것이 학습된 ‘수치심’과 ‘거부감’ 임을 머리로 알더라도, 그러한 피해 경험에 대한 폭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그런 의미에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김영서 님의 용기에 경외감을 표한다). 소위 ‘논란거리’가 되는 성폭력 피해 경험일수록 그것을 발화했을 때 결국 개인이 감당해야 할 심리적 부담이 더욱 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성폭력 피해자(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여성은 거의 없겠으나)의 입장에 따라, 저마다 할 수 있는 만큼만의 연대를 하는 것도 나름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억압된 피해의 기억까지 최대한 발굴하여 공론화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폭로의 목소리가 안전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응원하거나 조력하는 역할까지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발화를 독려하며 연대하기”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곁에함께심리상담센터 대표 /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