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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Sep 18. 2022

계절에 가졌던 기대

계절의 기록 #3




계절의 기록을 남기겠다고 결심하면서 두 가지 기대를 했다. 하나는 하루 중 잠시라도 내가 지금 일 년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갈 것이라는 기대. 또 하나는 글쓰기를 일상으로 쉽게 데리고 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나 이제 글 쓸 거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마!' 그런 식 말고 맘에 드는 영화나 책을 보고 가벼운 글 한 편 툭, 산책을 하고 나서 또 하나 툭, 매일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졌으면 했다. 계절은 집 근처를 걷는 것만으로도,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집안에서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일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단순한 언어로 남길 수 있으니까.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 바쁜 일을 다 마쳐두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녁 산책을 하는데 저녁달이 예뻤다. '보름달이 되면 더 예쁘겠지?' 맘 편히 보낼 추석 연휴에 대할 기대도, 추석을 보내고 나면 더 가까워질 가을에 대한 기대도 같이 커졌다. 추석 연휴 첫날. 외출을 하려고 밖에 나왔는데 햇살이 강렬해서 선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자동차 소리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참매미 소리가 맞은편 가로수에서 들렸다. 요즘은 계속 말매미의 독주만 들었는데 참매미 소리는 오랜만이었다.  오전 11시에 날씨를 보니 25.9도에 오후 최고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반팔을 입었는데 통기성이 좋지 않은 옷감이라 땡볕 아래를 걸었더니 목에 땀이 찼다. 기념일이 추석과 겹쳐 미리 경복궁 근처 한옥 레스토랑을 예약해뒀다. 가을이 오면 서울의 사대문 안을 걷고 싶고 한옥이 그립다. 날이 좋아 레스토랑의 모든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정원의 배롱나무가 9월임에도 여전히 하얀 꽃을 풍성하게 매달고 있었다. 배롱나무 꽃에 날아드는 벌과 이름 모를 곤충들과 한옥의 처마와 파란 하늘을 보면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경복궁을 가로지른 후 종로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어 커피스트에 갔다. 햇빛에 눈은 제대로 뜨지 못해도 그늘에 들어가면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작은 테라스 테이블에 앉았는데 맞은편 문을 닫은 미술관에서는 새소리만이 들리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는 추석에만 느낄 수 있는 느긋하고 특별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연휴, 한적함, 파란 하늘, 바람, 새, 커피, 책.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놓은 시간. 오래전부터 다닌 골목이라 그간의 세월과 기억을 함축해놓은 것 같은 기분이 더해지니 뭐랄까, 자리에 앉아 세상에 그 어떤 어렵고 두꺼운 책이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이 머리가 맑아지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가 솟았다.







운을 그날 하루에 몰아 쓴 것처럼 모든 걸 기억하고 싶은 연휴 첫날을 제외하고는 흐리고 습하고 더운 날이 이어졌다. 기대가 자주 어그러진 열흘이었다. 스무날 넘게 빼먹지 않고 하늘을 보고 날씨를 체크하고 계절의 변화를 기록했는데 그런 순간을 가져도 시간은 빨리 흐르더라. 계절을 적는 것은 쉽고 단순해서 몸에 힘을 주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직접 해보니 모든 글쓰기는 어려웠다. 추석 당일의 보름달은 구름에 가렸다. 9월 16일에는 비까지 꽤 내려서 지난 6월, 장마 기간 중의 어느 날인 줄 알았다. 몸이 습기를 머금어 처졌다. 머릿속에 9월이 가을의 시작이라고 입력이 되어 있는데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니 마치 계절이 정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습하고 흐리고 더운 사이에도 계절의 작은 즐거움들이 있었다. 불타는 노을을 구경하고 길가에서 맨드라미와 천일홍을 발견했다. 틈이  때마다 대추나무의 열매가 얼마나 익었는지 살펴보고, 신기한 열매를 보면 이름을 찾아봤다. 이파리는 느티나무의 것과 닮았는데 주황색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마가목이었고, 분홍빛이 도는 가지 위에 연두색 열매가 알알이 달려있는 것은 자리공이라고 했고, 흰색  아래 아주 귀여운 열매가 달린 풀은 까마중이었다. 계절이 정체하고 있는  같은 느낌은 연휴가 끝난 후에  바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게으름을 부린 날들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열매들은 기대도 정체도 없이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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