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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 Jan 29. 2018

구땡세대, 진정한 사랑은 어디로 갔나

박민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말했다. 지금 시대의 청소년기는 19세까지가 아닌 24세까지로 늘려 규정해야 한다고.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는데 인간의 성장이 따라오지 못해 청소년기를 재정의해야 하는 시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 있던 내용인데, 옛날 인디언들은 말을 달리다 중간에 한 번쯤 뒤를 돌아 자신이 달려온 곳을 바라본다고 한다.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려주는 일종의 의식인 셈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 주인공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가속화된 시대 속 좀처럼 따라오지 않는 영혼을 기다리느라 발만 동동대는 인디언인 내가 있다. 


    19살, 살아가는 형태는 제각각이겠지만 그 당시의 우리들에겐 공통된 캐치프레이즈가 있었다. ‘좋은 대학을 가야 성공한다’. 그 구호는 명백한 기성의 것이었지만 나는 그 메시지를 맹목적으로 따른 유년기의 형태를 선택했다. 그 시기에 어느 누가 선택이란 능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반문할 수 있겠으나 수동적인 태도 또한 선택이다. 나는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귀찮았고 부모가 쉽게 기뻐하며 내 인생도 잘되는 일석이조의 길이라 생각했다.


    지난 4년간의 대학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시시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인생을 시시하다고 표현했을 때 그 시시한 감정을 바로 공감한다는 것이 분할 정도로 시시한 인생이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방 안에서 줄곧 누워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율적인 형태의 대학교가 어색해 등교를 했으니 하교해야 하는 학생처럼 집에 간 듯하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지내도 괜찮았다. ‘아직 젊으니까 괜찮아’라는 말에서 오는 ‘HOPE’를 정말 막연하게 믿었다. 21세에는 1년이 흘러도 내 삶을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에 당황해서 버둥댔다. 이 길 잃은 영혼에게 누군가 계시를 내려주길, 무엇을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된다는 과거의 그 메시지처럼 목표를 정해주길 바랬다. 서둘러 목표를 설정했고 나름 원하는 인생을 짜내 이곳저곳 동분서주하며 지냈다. 그렇게 2년, 고개를 숙이고 뿔부터 들이대는 황소처럼 세상과 부딪히며 얻어낸 건 소설의 주인공이 발견한 것과 똑같은 ‘세상이란 벌레’였다.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들은 말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잘생기고 예쁘면 고시 3개 패스한 것과 같다’는 말이다. 실제로 세상은 그랬다. 잠깐 머물렀던 회사는 뒤에서 여사원들의 외모 순위를 매겼고 상사는 내 앞에서 동료 여사원의 외모가 이 회사에서 제일 예쁘다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몇 번이고 했다. 화장한 날과 화장하지 않은 날에 업무를 부탁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달랐고 뒤늦게 성희롱임을 안 날도 있었다. 빛나지 않는 여자에게 같은 여자들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도 그때 알았다. 


    ‘미안, 내가 나이가 많아서..’라는 말을 달고 사는 동료 언니가 있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주변 여사원들의 수군거림은 얼마 못가 내 귀에도 들어왔다. 29살이나 먹어서 저러고 있다는 말부터 피부가 너무 까맣다는 말까지 들렸다. 딱히 언니와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빴다.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건 그 기분 나쁨을 수군거리는 저들이 아닌 언니한테 풀어버렸다는 것이다. 여느 날처럼 내가 나이가 많아 미안하다는 그녀에게 나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나이가 많다는 얘기는 도대체 왜 하는 거예요? 그게 대체 왜 미안한 건데요?’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세상에게 여자가 나이가 많은 것은 ‘미안해해야’하는 것이었다. 


    외모가 권력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들어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직접 목격한 세상 속 외모가 차지하는 힘의 크기는 매우 강력했다. 그 힘의 폭력성은 이 소설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나도 그 힘에 매료되어 한때는 하루 24시간 내내 외모만 생각한 나날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이 사랑하는 모습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왜 공허해했는가.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난 후 나는 급격히 세상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1+1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마구 상상력을 키웠으나 결국 2라는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답은 2일뿐이고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2 임을 ‘너무’ 알아버린 나는 세상도 시시하고 사람도 시시하며 사랑마저도 시시하다. 이 매너리즘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어서, 나의 구땡 세대는 연애마저 소극적인, 사랑이 무기력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언제까지나 나에게 판타지다. 누군가는 그 판타지를 아름답기 때문에 판타지라고 하겠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판타지가 판타지이기 때문에 슬프게만 느껴진다. 물론 사람과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데에 이유는 없다. 작가의 말마따나 '모든 사랑은 이해가 아닌 오해니까'. 다만 누가 봐도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라는 ‘판타지적’ 설정에 적어도 어떤 사건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단순히 '그녀를 보니 귀에서 요들송이 들려왔어요-'라고 운명적 순간을 이해하기엔 내가 아직 너무 사랑을 모르는 탓일까? 때문에 더더욱 그 사랑의 이유를 주인공의 어린 시절-아름다움만을 사랑하여 가족을 버린 아버지와 그를 뒤에서 돕기만 한 초라한 어머니-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걸지도. 가혹한 세상 옆에 들러리 선 시녀처럼 서 있던 우리의 자화상이란 작가의 표현에 공감하지만 ‘그래도’, ‘끝내’ 지금의 우리 모두가 영화와 같은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행운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도’란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세상을 견지하는 태도이며 아직까지 남아있는 세상에 건 조그마한 환상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길이다. 




* 서평을 쓰려 했는데, 감상문으로 빠져버렸다.. 이런 소설에는 정말 속수무책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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