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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예리 Aug 14. 2023

책 '이방인', 관찰자 기자가 실존주의를 접했을 때.

마냥 관조자일 필요가 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키보드를 탁탁 두드린다. 민감한 사안을 다룰 때일수록 냉정해진다. 나는 종종 기자라는 직업을 '적극적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소극적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기자는 세상 이야기를 가까이서 듣고, 노트북을 열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안을 대중에게 전달할지 고민한다. 최전선에서 세상을 관찰하지만 거기까지다. 행동으로 옮기진 않는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인데도 기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 뫼르소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무심했다. 


아래 구절들은 자기 삶에 관조적인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그가 나에게 '자네'라고 말한 것을 무심히 들어넘겼으나, "자넨 이제 내 친구야"하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말에 놀랐다. 그는 거듭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야 그렇지"하고 대답했다. 나로서는 그의 친구라고 해도 무방한 일이었고, 그는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가족, 친구, 연인은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뫼르소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가 아랍인을 죽이는 순간에 이 태도는 더욱 강조된다. 태양빛이 강렬했고, 바다가 답답하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고, 방아쇠가 당겨졌다는 것이다. 방아쇠를 '당긴' 게 아니라 '당겨졌다'고 표현했다. 자기 행동이 본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는 대로 사는 삶을 상징하는 듯하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야 생에 대한 의지를 느낀다. 삶을 연장하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치솟았지만 이미  늦었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솔직히 아직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모든 일에 관조적 태도를 유지하기 보다는 순간순간 자신의 삶을 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기자 정체성이 발동되면 세상과 한 발짝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기자는 관찰자라고 판단해서다. 그러다 보면 종종 내가 뭘하고 있는지 현타가 올 때가 있다. 업계 분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뫼르소처럼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행동하는 자와 관찰하는 자 간 좁혀지지 않는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관찰자라 해도 마냥 뫼르소처럼 관조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자여도 기사가 미칠 영향력과 깊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적극적인 사람 중에 가장 소극적이지만 그럼에도 적극성을 띠는 실존적 기자(?)로 거듭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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