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세종까지 그 이야기의 시작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백병원이다.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은 2023년 8월 31일부로 진료가 종료되었다. 나의 본적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이다. 지금은 연립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에는 야트막한 한옥집이 있다.
나는 1970년대 말에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1년 8개월 강남 신반포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는 강남구였고 지금은 서초구이다. 그 동네는 반포3동이기도 하고 잠원동이기도 했는데 행정동, 법정동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정확한 기준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살던 신반포 4차를 제외하고 주변 아파트들이 대부분 재개발이 되고 있다. 뭐 우리나라에서 40년 넘은 아파트들이 재개발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나는 내 기억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나의 고향이 곧 없어진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2020년 말에 41년간 거주하던 집에서 이주하며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41년 산 집을 떠나며 -
최희준, 이승환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있다.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한집에 오래 살다 보니 정이 너무 들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집이 나의 고향집이고 반포, 한신 4차가 나의 고향이다.
앞으로 그냥 2년, 4년씩 전세나 떠돌이로 살며 집에 정을 붙이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저녁 집으로 오는 길에 이 길이 마지막이려니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뻐근하다.
둔촌 주공 살다가 떠난 사람이 책도 내고 다큐도 만들고 하던데..
언젠간 이 집도 재개발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오늘이 이 집에서 마지막밤. 안녕.
진짜 너무 아쉬웠고 그즈음 해서 서울 기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내가 살던 주변의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 말고도 여러 군데에 살았다. 어렸을 때 강릉을 시작으로 안동에도 살았고 대학교 때는 뉴질랜드로 교환학생을 갔다. 군대는 전라남도 광주, 부산, 경기도 오산(평택)에서 근무했고 군제대 후에는 중국 시안, 북경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지금은 세종시에 거주한 지 12년이 넘었다.
원래부터 관심이 많긴 했지만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나는 그 지역의 지명, 유래 그리고 그 지역의 역사와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다. 어느 지역을 가도 꼭 한 바퀴씩 돌아보고 예전에 여기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상상을 해본다.
세종에 살면서 금강을 따라 공주 쪽으로 자전거를 자주 탄다. 공주에도 반포라는 지명이 있다. 공주시 반포면(反浦面), 서울의 반포는 盤浦이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마한시대에 유성 쪽으로 신흔국이 있어서”
부족 국가에 이웃하였던 지역입니다. 백제시대에는 웅천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웅주에 속하여 신라와 경계한 탄현과 동부산성에 드나드는 발길이 끊일 새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신라 성덕왕 때 동학사가 창건되고 계룡산 주변에 활발하게 마을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해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지역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 군의 지역인데 원봉리에 있는 반개, 반포의 이름을 따서 반포면이라 하였습니다.
반포면은 마한 때 유성 쪽에 신흔국과 접해 있었고 백제 때 웅천, 신라 때 웅천주 웅주에 속해 있었다. 신라 선덕왕 때 동학사가 창건되어 계룡산 주변에 마을이 활발하게 형성되었습니다. 고려 때는 공주목과 덕진현의 관할에 속하였고 조선시대 초기에도 공주목과 덕진현의 일부 지역이었으며 조선말에 공주목 면리로 원봉리에 있는 반개, 반포의 이름을 따서 반포면이라 하였습니다.
- 공주시청 홈페이지 2024.11.
서울 반포의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다.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하여「서릿개」 곧 반포(蟠浦)라 하다가 훈이 변하여 반포(盤浦)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또 일설에는 홍수 피해를 입는 상습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 불렀다 합니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으나 일제 때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 서초구청 홈페이지 2024.11
이렇게 각 지명의 한자와 유래는 좀 다르지만 나는 참 비슷한 점을 많이 느낀다.
한강에서 서쪽으로 자전거를 탈 때와 세종에서 공주, 부여 쪽으로 자전거를 탈 때 참 비슷하다는 점을 많이 느낀다. 어떻게 어떻게 하여 서울이 도읍이 되어 지금과 같이 변하였는데, 공주 부여 가는 길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농지들이 많다. 그리고 공주, 부여도 한때는 (백제 때에는) 한 나라의 수도였다.
한성 백제 시절의 백제가 국력이 기울어 웅진성(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고(475년) 또 기울어 사비성(부여)으로 옮긴 것(538년)을 생각하면 가끔은 망국의 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내가 서울에서 세종으로 온 그 이동경로와 같이 백제 왕조도 한성에서 웅진으로 또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것을 생각하면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서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까지 가 보면 백제인들의 못다 이룬 꿈, 한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밀양 박 씨이다. 어렸을 때는 나를 신라의 후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구 백제의 지역에 12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는 백제에 대해 많은 친근감이 간다. 가끔은 세종시 호수공원 바람의 언덕 같은 곳에 올라 2000년 전에 여기 살았던 백제 사람들도 나와 같은 달을 봤겠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을까?를 궁금해하곤 한다.
내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현재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어떤 시간의 끈 같은 것, 그것을 찾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그로부터 미래까지 바라보려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와 지리, 현재와 미래 그 어딘가에서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