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수선화
요새는 홍대보다 을지로를 더 많이 찾는다. 밥을 먹으러, 커피를 마시러, 술을 마시러. 물론 거대한 공룡 같은 상권을 가졌다곤 못하겠지만, 메뉴는 다양하지 않아도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석 같은 공간들이 있다. 맛집 지도를 열면 너무 많은 맛집들이 핸드폰에 뜨는 바람에 오히려 버벅거려 검색이 안 되는 홍대보다는 한 번 들어도 그 이름을 쉬이 잊지 않게 되는 을지로의 공간들을 어쩌다 보니 조금 더 좋아하게 돼버렸다. 그중에서도 삼고초려하여 겨우 처음 가 본 곳을 소개하려고 한다. 침대 없이 커피와 술을 파는 호텔, 호텔 수선화다.
을지로와 종로 일대는 근대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중한 곳으로 여겨지는 한편, 도시 계획을 하거나 나처럼 건축 설계를 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골칫덩이 동네이기도 하다. 비좁은 옛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의 법규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쉽게 신축을 결정 내릴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다. 차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 각종 어닝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거리, 증축에 증축이 더 해져 원래의 모습을 찾아내기 힘든 낡은 건물들. 변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을지로 쪽으로 들어서면 알싸한 냄새가 거리를 감싼다. 아크릴을 재단할 때 나는 특유의 냄새. 인쇄된 종이를 옮기고 있는 지게차들과 짐을 가득 싣고 움직이는 오토바이들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아주 세심히 호텔 수선화의 간판을 찾아야 한다. 쉬이 눈에 띄지 않으니까. 평일엔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들 사이에, 주말엔 문을 닫아 썰렁한 거리 가운데 고개만 빼꼼 내밀고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호텔 수선화의 위치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본다. 큰 길가에 면하지도 않았고, 찾기에도 쉽지 않고 간판이라고 하기엔 옹색한 크기의 안내 표지판 정도만 있어서 한 번에 찾는 사람보다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하지만 그런 경험은 그 동네를 한 두 바퀴 돌고 돌아 호텔 수선화의 문을 연 순간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은 이질감을 제공한다. 예상 밖의 공간이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을지로에서 주변을 헤매는 그 시간이 공간을 더 인상 깊게 느끼게 하는 애피타이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호텔이 아니면서 이름이 호텔이다. 침대가 없으니, 숙박이 될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호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실 호텔보다 살롱에 가까운 기능을 한다. 호텔 수선화의 내부에서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혼잡하게 섞여 있는데,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고, 또 누군가는 맥주를 마신다. 노트북을 꺼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2차 회식 장소로 이곳을 택한 사람들도 있다. 때로 촬영이 잡혀 공간을 대여해주기도 하고, 전시를 진행하기도 하는 이곳을 운영하는 세 명의 디자이너들은 실제로 이 공간을 작업실로 사용한다.
애초에 길쭉한 공간을 또다시 길게 반을 뚝 잘라 나눴다. 사진 속 왼쪽으로 보이는 공간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열려 있는 공공의 공간, 사진 속 오른쪽에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 방향으로 된 경사진 지붕) 아래의 매장들은 모두 세 명의 디자이너들을 위한 개인 작업실 겸 쇼룸이다. 쇼룸은 동일한 너비를 가진 박공지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채 또다시 각자 특징을 가진 세 개의 공간으로 분할되는데, 디자인이라는 큰 틀에서 묶이기는 하지만 작업 내용물은 모두 다 다르다. 가장 안쪽 프레임으로 구성된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실부터 색색깔의 골강판을 덧댄 주얼리 디자이너의 작업실, 목재 가벽으로 막힌 작업실은 가방 디자이너의 작업실로 이루어진다. 따로 또 같이 모여 있는 이 작업실을 운영하며 디자이너들은 동시에 외부 사람들도 이곳에 초대하기로 한 것.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을 개방한 예는 분명 처음이 아니다.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같이 일하는 것도 이제는 낯선 풍경이라고 볼 순 없다. 코워킹 스페이스들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지만, 호텔 수선화는 단순히 작업실 또는 코워킹 스페이스라고 단정 짓기엔 그 성격이 조금 더 독특하다. 이곳은 작업실을 공유하는 개념이라기보다, 작업실에 초대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작업실을 개방해 '같이 일하자'가 아닌, '저희 작업실에서 먹고 마시며 노세요'와 같은 느낌을 주니까.
오픈되어 있는 테이블 자리 옆으로 디자이너들이 작업하는 모습, 작업 공간의 내부, 작업의 결과물까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원한다면 구매도 가능하다. 각자의 작업실을 각 디자이너가 원하는 방향대로 꾸며낸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덕분에 다양한 느낌이 어우러져 꽤 자주 촬영 문의가 들어오는 듯하다.
건축이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에겐 병이 있다. 벽에 구멍이 나 있다면 막고 싶고, 모든 전선들은 숨기고 싶고, 비뚤어진 것은 똑바로 바로 잡고 싶은 직업병. 그런 의미에서 호텔 수선화는 건축가가 완성할 수 없는 디테일을 가진 곳이다. 멀티탭은 공중에서 내려오고, 배관이 지나가고, 천장엔 구멍이 뚫려 있다. 아마도 건물을 지을 당시 자재를 오르내리는 데에 썼던 구멍을 제대로 막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로도 공장으로 쓰였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낡은 문짝과 삐뚤어진 비상구 조명, 덧칠에 덧칠을 거듭한 페인트들의 흔적들이 이곳이 을지로였음을 잊지 않게 해주는 가운데, 이런 디테일들을 몽땅 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잔다르크 같은 존재가 이곳에 있다.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패턴을 가진 조명들이 공간에 패턴을 새겨 넣는다. 낡아서 뜯어지고, 벗겨지고, 비뚤어진 많은 것들에게서 시선을 빼앗아 조명에 집중하게 한다. 오히려 새하얗게 정리된 공간보다 이곳에서 이 조명이 더욱 빛을 발한다. 말하자면 화룡점정. 이쯤 되면 빼어난 가구나 조명이 공간의 마지막 퀄리티를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낡은 가구와 함께 어우러지는 펜던트 이외에도 테이블 위에는 같은 스타일의 천을 가지고 만든 스탠드 등이 또 있다. 화려한 색과 문양을 항상 고민만 하다가 결국 가장 간단한 무채색의 조명과 가구를 선택하는 건축가들과 비견되는 점이다.
건축가로서 흥미가 동하는 공간을 찾아다니다 보면,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은 오히려 몇 되지 않는다.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공간은 언제나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디자이너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패턴과 연출들이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가 그려내기 힘든 공간에 대한 동경 내지 부러움 때문이 아닐는지.
글 초반에 삼고초려하여 겨우 처음 가본 곳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일요일에 영업을 안 하는지 모르고 호기롭게 갔다가 닫힌 문 앞에서 방문 실패. 두 번째 방문 때에는 문은 열려 있었으나 외부 촬영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실패. 세 번째 시도에 겨우 성공했다. 호텔 수선화의 SNS 확인과 더불어 확인 전화까지 했다. 전화까진 아니더라도 방문 예정이라면 SNS 정도는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