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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Mar 27. 2021

드라마 <스페이스 포스>를 봤습니다.

적을 상대할 때도 "예의"가 필요하다.

 나는 코미디, 그 중에서도 시트콤을 매우 좋아한다. 실제로 넷플릭스에 입문한 두 달 동안 가장 많이 본 영상은 <모던 패밀리>나 <브루클린 나인-나인> 등 미국 시트콤이다. 그러나 "코미디가 가벼운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단언컨대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코미디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벼움 속의 무거움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대표적 주자인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18세기 당시 극작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코미디를 쓰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고 소회했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 비극론은 있지만, 희극론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시대를 초월하는 희극의 규칙을 발견하기란 어려웠지 않았을까라고 나는 상상한다.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편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보면, 자신의 세 딸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뜯기는 아버지 리어 왕은 지금도 안쓰럽다. 사람을 웃기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생활밀접형이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고 내가 웃지 않았던 걸까...


움베르토 에코는 나와 정반대로 시학 2권이 있을 거라는 상상으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썼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에서 어릿광대를 작가의 말을 대신해주는 캐릭터로 자주 설정했다. 어릿광대의 명대사 중 하나가 "정치는 진짜를 가지고 가짜를 말하지만, 예술은 가짜를 가지고 진짜를 말한다."다. 지극히 동감하면서, 이에 가장 걸맞는 예술이 코미디라고 본다. 코미디는 풍자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코미디의 사회적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성역"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헤집어 놓아 사람들을 통쾌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코미디는 "성역"이라는 금기를 침범하는데 그 특권과 임무가 있다. 그걸 통제하는 순간, 코미디는 죽는다.



 그래서 시트콤 드라마 <스페이스 포스>를 볼 때도 가벼움 속의 무거움, "성역"을 건드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스페이스 포스>의 무거움, "성역"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의 쇠퇴"다. <스페이스 포스>의 주인공, 네어드 우주군 대장은 전형적인 중년의 위기를 겪는 인물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갑자기 깡시골로 발령되지 않나, 아내는 감옥에 가지 않나, 딸아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왕따가 되지 않나. 그런다고 우주군 일이 순조롭지도 않다. 자신의 파트너인 맬러리 박사는 맞는 말만 따박따박하지 않나, 자신의 비서인 브래드 준장은 네어드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고, 대체 대장 체면이 말이 아니다. 우주군 밖은 더 하다. 공군 대장은 신생 우주군을 없애려 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위성으로 미국 우주군을 계속 노리고 있다.



 네어드의 상황을 요약해보니, 현재 미국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전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9.11 사태와 서브 프라임 사태로 미국의 위기는 더욱 커지지 않나, 사회는 극심한 인종(Black Lives matter)과 성 갈등(Metoo)을 겪지 않나, 정치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화가 안 될 정도로 극도로 대립하지 않나, 밖에서는 중국이 1위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지금 미국은 네어드처럼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다. 네어드 대장이 하는 연설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 조국(미국)은 달에 사람을 보냈습니다."는 중년의 미국이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인 셈이다.



 <스페이스 포스>에서 우주군이 만들어진 계기는 지구 상공에서 패권을 쥐고 정복해서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해서다. 미국은 항상 외부를 정복해야 하는 나라다. 나는 이 생각에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떠올렸다. 토크빌은 미국은 자연을 싫어하기 때문에 계속 서쪽으로 개척하고 싶어한다고 썼다. 실제로 미국은 태평양까지 영토를 확장했을 뿐 아니라 하와이 그리고 필리핀, 아랍문화권까지 계속 손을 댔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썼던 1831년이 미국은 13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었고, 세상에는 산업혁명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토크빌의 통찰력에 대해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 없는 유럽의 귀족 및 지식인"을 독자로 상정하여  <미국의 민주주의>를 썼다. 마치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듯이 말이다.


 나름의 고백을 하자면, 나는 토크빌이 ‘미국 사람’이라고 오해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작가들도 자랑스럽게 언급하는 책이라서, 당연히 미국 사람이 미국을 자랑하는 책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토크빌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귀족이었다. 토크빌은 미국을 여행하며 당시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을 만난다. 토크빌은 정치지도자의 자격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며 앤드류 잭슨을 혹평했다. 하긴 전쟁 영웅을 나폴레옹으로 알던 토크빌이 원주민들을 학살했던 전쟁범죄자에 가까운 앤드류 잭슨을 봤을 때의 실망감은 꽤 컸을 것이다. 토크빌의 입장에서 앤드류 잭슨은 지금의 트럼프 같았을 것이다. "왜 뽑힌 줄도 모르겠고, 정치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인데 어떻게 된 걸까?"



 만약 토크빌이 "앤드류 잭슨이 뽑힌 이유는 미국 유권자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결론냈다면, <미국의 민주주의> 고전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와 달리 미국 나름의 이유와 질서가 있는  아닐까?" 토크빌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이 자격 미달의 정치지도자를 뽑는다 해도, 미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고안한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냉철한 인간 분석에 감탄했다.


케네디의 '뉴프론티어'로 드러난 미국의 개척 욕망은 더 이상 서쪽으로 갈 수 없어 <스페이스 포스>라는 이름으로 우주로 향한 게 아닐까?


 미국 우주군의 발상은 달에 사람을 처음 보낸 "라떼"를 회복해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네어드 대장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다고 1831년처럼 항상 카우보이처럼 살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2021년이다. 청년 시절의 "라떼"가 아무리 그리워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언제까지 밤새 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아침 7시까지 매일 놀 순 없는 노릇이다. 모든 조직에는 반대 세력이 있는 법이다. 바로 과학자 맬러리 박사다.



 <스페이스 포스>의 우주군은 현재의 미국을 은유한다. 개척, 정복, 군사화하려는 우주군의 야심(네어드 대장)과 지식, 도덕, 공공선을 추구하는 우주군의 양심(맬러리 박사)이 서로 대립하는 우주군은 현재 갈기갈기 찢어지려는 미국을 보는 듯하다. 네어드가 가장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내면화한 '군인'이고 맬러리가 가장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내면화한 '과학자'인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다만 우주군과 현재 미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상대방의 능력과 관점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스페이스 포스> 속 맬러리 박사는 네어드 대장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반대한다. 맬러리 박사는 과학 지식을 동원해 네어드 대장을 설득하려 한다. 과학 지식을 모르는 네어드 대장은 군인으로서의 삶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으로 판단을 내린다. 맬러리 박사는 네어드 대장을 반대하면서도 그의 능력과 철학에 감탄하고 인정한다. 네어드와 맬러리는 성숙한 자세로 대립하고 공존한다. 물론 시트콤 속 그들은 이내 유치하게 싸우고 반대하지만...


맬러리 박사를 연기한 존 말코비치는 그의 매력을 120%로 뽐낸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는 맬러리 박사나 네어드 대장 같은 사람이 별로 없다. 혹자는 현재 미국의 갈등은 너무 의견이 달라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옛날부터 사회 속 의견들은 서로 달랐다. 오히려 문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적으로 대립할 때도 호적수로서 서로를 진지하게 대해야 하지만, 지금 미국 내부의 갈등은 적을 상대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깎아내리는 것에서 비롯한다. 눈 앞의 적을 애써 무시하며, 어떻게 갈등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 지금 미국의 문제다. 사실 미국은 갈등을 시작조차 안 했다. 너무 의견들이 달라서가 아니라 너무 끼리끼리 놀다보니, 갈등 미숙아들이 넘쳐난 상황이 지금 미국 사회 전체의 문제다.



 세상은 "적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적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로 갈등을 풀어나간다. 세상은 토론 대회가 아니다.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압살해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은 별로 없다. 설령 이긴다 한들, 상대방이 "네, 알겠습니다. 당신 말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순응하지도 않는다. 이상한 말이지만, 오랜 기간 동안 상대한 적과는 기묘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 상대의 의견을 교환하며 상대의 인간적 매력과 연민 등이 쌓아지면서 적에 대한 일종의 "인간적 믿음"이 생긴다. 그런 부차적인 것에 의해 만들어진 신뢰를 통해 적과의 갈등에서 적과의 협상 그리고 공존으로 나아간다(물론 싸움이 끝나는 건 절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적과의 갈등을 경험한 사람은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넣을 여유 공간이 많아진다. 다양한 사람들과 갈등하고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나' 자체가 다양하고 컬러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일하고 완결된 사상으로 가득 찬 단독주택보다는 다양한 주민들이 복닥복닥한 아파트에 가깝다. 아파트의 방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감히 성장이라 부른다. 적과 싸우다보면, 나의 다양한 모습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같은 사람과 있다보면, 나의 모습이 하나라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미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에 걸맞게 자기 안의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민자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아도 된다. 단지 적(이민자)을 깔보지 않고, 진지하게 대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마치 프랑스 제1제국의 귀족 토크빌이 신생 민주주의 국가 미국을 얕보지 않고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적에 대한 예의를 지켰을 때, 미국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을 성숙하게 풀어가는 사람을 어른이라 부르지 않던가.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지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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