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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Nov 03. 2022

우울해지면 목욕을 합니다

우울은 수용성이니까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눈을 떴다. 방이 캄캄한 게 아직 아침이 아닌가 싶었지만 시계를 보니 일어날 시간이 확실했다. 나를 반긴 건 어제와는 사뭇 다른 뿌옇고 누런 하늘이었다. 미세먼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건 겨울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점심이 되어도 계속 어두컴컴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기분이 축 처진다. 생각과 행동이 차분해지고 한없이 느려진다. 입맛도 사라진다. 뭘 먹고 싶지도 않고 먹더라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 하루. 이불 속에 들어가 하루 종일 누워서 영화나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내겐 할 일이 있다. 엊그제 외서 검토가 가능하냐는 연락을 받았고 덜컥 수락했기 때문이다. 2주간 주말도 없이 계속 일해서 이번 주는 조금 쉬어볼까 했는데 책을 보자마자 이건 해야겠다 싶었다. 사회 불안 장애를 극복해나가는 내 이야기를 브런치북으로 만들었는데, 신기하게도 불안에 대한 책을 검토해달라고 요청받은 것이다.


불안에 대해서라면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괴롭히던 이 녀석이 한 때는 참 미웠지만, 그래도 덕분에 나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심리상담도 받고 관련 책도 많이 읽었고 무엇보다 내가 산 증인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중에 불안에 대해 쓴 책을 번역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외서 검토 요청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번역 요청은 아니라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신이 났다. 처음 책을 받은 날에는 문제없이 쭉쭉 읽어나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모니터를 들여다보는데도 글자가 잘 안 읽혔다.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 건가 싶어 누워서도 읽어보고 별 수를 다 써봤는데 자세가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럴 때는 나를 잘 관찰해야 한다. 짜증 내지 않고 내 몸과 마음이 어떤 호소를 하고 있는지 넓은 마음으로 살펴보면 신기하게도 답이 보인다.


몸을 살펴보니 허리와 등이 아팠고 계속 눕고 싶었다. 몸이 지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읽는 속도가 느린 나를 혼내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보였다. 이렇게 느리게 읽다가 언제 다 끝낼 거냐고, 다른 사람들은 2~3일이면 끝낸다는데 너는 왜 이렇게 못하냐고, 이렇게 실력이 부족해서 번역가로 데뷔는 할 수 있겠냐고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구석에서 쭈그리고 주눅 들어있는 내면의 아이가 보인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이 아이를 구해야 했다.


이럴 때면 나는 목욕을 한다. 스트레스는 지용성이라 치킨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우울은 수용성이라 샤워를 하면 나아진다고 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선다. 욕조에 받은 따뜻한 물 안으로 성큼 들어간다. 이상하게 욕조 안에 들어가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온갖 생각들이 부유물처럼 떠오른다. 대부분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이다. 나는 차분하게 뜰채를 집어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이 아이들을 걷어낸다. 그리고 따뜻한 물속에 몸을 푹 담근다.


시간이 지나자 몸에 붙어있던 때가 불어났다. 살짝 건드리니 우두득 밀려 나온다. 청소한 지 오래된 기계에 기름때가 찌들어있듯 내 몸에는 이놈들이 붙어있었다. 나는 북북 때를 밀면서 내 안의 걱정과 초조, 자책, 불안을 벗겨낸다. 그리고 뽀송해진 내 몸을 향이 좋은 이솝 바디워시로 구석구석 씻어준다. 그러면 남아있던 우울감마저 거품과 함께 씻겨 내려간다. 




사실 나는 목욕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습지만 목욕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읽고 외우는 것이 성장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틀렸다. 지쳐서 길바닥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를 애써 끌고 가려는 선택은 옳지 않았다. 시간은 오히려 더 오래 걸렸다. 게다가 결승선까지 꾸역꾸역 걸어가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지금 당장은 시간 낭비처럼 보여도 내 몸을 단장하며 컨디션을 살피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목욕을 하면서 마이너스로 가득 찬 생각 통을 비우고 플러스로 채운다. 개운해진 다음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한다. 다시 달릴 준비가 되었다 싶으면 내가 묻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나는 그렇게 책상에 자연스럽게 앉아 집중을 한다. 이번 검토서도 즐겁게 읽고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이 드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지만, 그 감정을 다루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불안을 데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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