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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집 Oct 18. 2021

어젯밤 동네에서 있었던 일

방모임 에피소드 1  

공동육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마 내 집에서 있었던 첫 방모임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또는 초대되었던 여러 방모임의 인상적인 장면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비슷하구나' 혹은, '사람 사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같은 것들. 내가 경험한 7년의 시간 동안에도 웃지 못할 낭패의 순간과 크고 작은 갈등들, 뜻밖의 감동 같은 것들이 누군가의 집안 부엌, 방과 거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 우리 집에 무법자가 왔다 


우리는 안다. 아이 하나만 생겨도 삶의 질이 얼마나 바뀌는지를.


"아유, 애 키우는 집이면 괜히 비싼 거 사지 마요~ 어차피 다 망가질 걸...."


가구를 사거나 사소한 집기 몇 개를 사러 가서도 종종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이들은 집 안의 고요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아이 셋 키우는 집에서는 하다 하다 화장실 욕조까지 깨 먹더라는 푸념을 듣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열 명 정도 집에 왔다고 상상해보자. 어린이집 아이들 뿐 아니라 그들의 형제, 자매들까지 합치면 에너지는 순식간에 몇 제곱으로 증폭된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피규어나 아끼는 장식품, 선물 받은 소중한 것들을 미리 안전지대로 치워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의 방모임 후 뼈 저리게 알게 되었다. 친동생이 러시아에 다녀올 때 선물로 사다 준 마트료시카는 정말이지 섬세하고 아름다운 디테일을 가지고 있었다. 인형 속에 또 인형이 또 인형이.... 그렇게 열 개의 마트료시카가 흐트러짐 없이 정교하게 채색된 모양을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인형이 조각조각 부서져 버렸던 날, 가장 안 쪽에 들어 있던 작은 인형까지 남김없이 쪼개진 걸 보면서 천진난만한 얼굴 뒤에 숨겨진 폭력성을 보았다! 안킬로는 자기 평생(7년 안쪽)에 걸쳐 아끼던 인형이나 그림 작품 같은 것들이 처참히 망가지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남의 아이가 어디가 내 아이 같아! 사악한 놈들' 하고 이를 갈았다.


평소에도 정원의 고운 꽃처럼 여린 마음을 가졌던 '샘물' 네의 첫 방모임 중 그녀가 놀이터에 나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엄마들이 전해주었을 때 '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그때는 둘째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서 방모임에 가지 못했는데, 그날 샘물의 상태가 매우 힘들어 보였다는 증언들이 속속 전해졌다. 어두운 밤 놀이터 가로수 아래 샘물이 측은하게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고.... 이걸 본 척해야 할까, 못 본 척 지나가야 할까 고민하다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훌쩍훌쩍)"


"샘물 많이 힘들죠? 첫 방모임 때 저도 그랬어요.(토닥토닥)"


"우리 아영이 소중한 아기 때 옷에다 도장을 찍고, 책도 다 찢어졌어요.(격해지는 흐느낌) 그래서 저도 모르게 00 이를 향해 고함을 질러 버렸어요. 그만하라고..."


방모임이 그녀에게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00 이는 유난히 에너지고 차고 넘친다며 그녀를 두둔해 주었다.


"제가 아이한테 성내는 걸.... 알콩이가 봤어요. 절 매정한 엄마라 생각하겠죠?"


"아휴~ 저라도 그랬어요! 샘물(토닥토닥)"


눈물을 닦던 샘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험난한 공동육아의 세계에 한 단계를 통과하는구나 싶어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방모임은 극기훈련 같은 경험이 될 수 있다. 



# 어젯밤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나는 회라면 사족을 못쓴다. 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단연 "회요!"라고 답한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며 백일 여를 집 안에서 보냈다. 오랜만에 방모임에 나간다는 사실에 무척 설렜는데 오늘 메인 요리가 '회'라는 미나리의 카톡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내 오늘 마음껏 회를 먹고 어른 인간들과 대화라는 것을 하리!'


울음으로 대부분의 의사표현을 하는 생명체와 먹고, 싸고, 자는 생명부지의 일에만 집중하며 살다 보니 '사회활동'이 너무나 그리웠다. "백일이면 방모임 데뷔로 괜찮은 시기다, 아가 그렇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묵힌 수다를 떨고 안부를 물었다. 이미 갓난아기는 이 품에서 저 품으로 돌며 어미 손을 떠나 있었다. 아아, 이 자유의 냄새! 무알콜 맥주 한 모금에 부드럽게 씹히는 회가 달디달다. 나는 웃고 떠들며 열심히 회를 먹었다. 

늦은 저녁 집에 돌아와 잠이 들려는데 거북이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뭘 잘 못 먹었나...." 심상찮게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더니 급기야 변기를 부여잡고 연신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속이 멀쩡해서 거북이가 급체를 했으려니 생각했다.

새벽에 싸한 통증이 온몸으로 몰려와 일어나 보니 한 숨도 못 자고 얼굴이 허옇게 질려 널브러져 있는 거북이가 눈에 들어왔다. 소름이 돋았다. '아, 나는 이제 시작인 거구나!' 그때부터는 거북이와 번갈아가며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았다. 하다 하다 초록 토는 처음 보았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잠깐 동안 '애 낳는 거보다 더 아픈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자 거북이는 거의 기다시피 병원으로 향했다. 거북이가 진료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아니 차를 여기다 이렇게 대 놓으시면 어떡해요!"


"죄..소..하미다 제가... 배가 너므 아ㅍ서 지그 벼워네..."


"헛, 아녜요. 괜찮아요. 얼른 치료부터 받으세요!!"


허리를 펼 수가 없어 구십도 각도로 몸을 접은 채 진료실로 들어가는데 반대로 나오는 '티라노'와 마주쳤다. 역시 상태가 안 좋았던 티라노는 거북이의 상태를 보고 단번에 알았다.


"거북이 괜찮으세요? 정말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그리고 지금 막 나온 진료실 문을 열고 의사에게 외쳤다.


"지금 들어가는 사람 저랑 어제 같이 있었어요!"


(카톡)

'저 혹시 어제 배 아프신 분 없으셨나요? 저는 어제 한 숨도 자지 못하고 토하다 병원에 왔는데 여기서 거북이를 만났네요. 지금 같이 링거 맞고 있어요.'


'저도 밤새 아팠어요. 지금도 너무 아프네요ㅠㅠ'


'문 연 병원이 어디인가요?'


'출근도 못하고 병원부터 왔네요.'


'저도 그래요, 아무래도 어제 먹은 회가 안 좋은 거 같아요.'


'세상 태어나 이렇게 배가 아픈 건 처음이네요.'


.....


연달아 올라오는 식중독 커밍아웃에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마음이 되었다. 뭔가 깊은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렇게 큰 고통을 나 혼자 겪는 게 아니구나! 어제 방모임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아프고 아침이 되어도 출근은커녕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급한 대로 살아남은 몇몇이 집마다 돌며 아이들을 등원시켜 주었고, 그제야 나도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아니, 어제 이 동네 무슨 일 있었어요?"


의사의 놀라는 탄성에 돌아보니 동네 병원 침상에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누워 있었다. "왔어요, 두루미..." 우리는 그렇게 사이좋게 누워 링거를 맞았다. 웃을 힘도 없었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만 나왔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정신 나간 것처럼 "아이고 배야"와 "큭큭"대기를 번갈아 했다. 식중독이 그렇게나 무서운 건지 처음 알았다. 나중에 문제의 횟집에서는 연신 죄송하다며 얼마의 위로금을 보내주었다. 회의 끝에 우리는 그 돈으로 터전의 아이들 교구를 구매했다. 한동안 그렇게나 좋아하던 회를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고, 지금도 날씨가 따뜻해진다 싶으면 차마 회에 입도 대지 못한다. 그날의 아픔이 선명하게 떠올라 고이는 침도 싹 말라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아주 오랫동안 이 날의 소동을 이야기하곤 한다. 터전에서 아이들이 우리의 아픔 값으로 번 나무 자동차와 소꿉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볼 때마다 '그래도 저건 남았구나.' 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기억일지라도 지나고 나니 두고두고 쏠쏠한 안줏거리였다. 지금도 티라노는 그때 병원에서 만난 거북이의 성대모사를 능숙하게 선보이며 우리를 배꼽 잡고 웃게 한다. 함께 아팠다는 게 함께 즐거웠던 경험만큼이나 특별하고 친밀하게 기억될 수 있다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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