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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Nov 22. 2023

지나간 음계와
어떤 장면

사진으로 순간을 담는 일


16.



  울창한 나무 사이를 빙빙 돌던 도중 피아노를 발견했다. 숲에 사는 피아노라니, 영화 속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아 두근거렸다. 나란히 걷던 친구가 내게 한 번 쳐보라는 눈빛을 보냈고, 반갑게 건반 위에 손을 올린 나는 이내 딱딱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입시곡으로 몇 백번이나 연주했던 쇼팽의 어느 곡이 엉망으로 어긋나버렸던 거다. 손은 딱딱하게 굳어져 건반 하나를 눌러야 할걸, 두 개를 동시에 눌러 이상한 소리가 났다. 전국 콩쿠르에서 상을 받고 예술고등학교를 준비하던 과거가 전생처럼 느껴졌다. 십 년 전만 해도 음계 사이를 펄쩍 뛰던 말랑한 손이 지금은 왼손과 오른손을 잘 조정하지도 못할 만큼 딱딱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최대한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고 조율이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더 이상 칠 수 없다며 어색한 상황을 무마했다.


  피아노를 파는 백화점을 지나친 건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우연하게 숲의 피아노를 발견한 그 친구와 방문한 백화점에서 치고 싶은 피아노를 찾았다. 전자 피아노였는데, 손가락으로 패드를 누르면 여러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되는 고가의 악기였다. 새로 나온 피아노인 데다가 전자기도 해서 조율 핑계는 댈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의자를 당겨 엉덩이를 붙이고 말았다. 이번에 칠 음악은 바흐의 한 곡이다. 머릿속으로 흐르는 음악과 다르게 귀로 들리는 음악은 험상궂었다. 역시 돌처럼 굳은 손이 여유롭고 부드러운 음악을 소화할 수는 없었다. 절망에 빠진 나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고, 친구는 애써 모르는 척하며 피아노 소리가 청아하다는 말만 운운했다. 다음 날까지 상심에 빠진 나는 두 시간 동안 그랜드 피아노실을 빌렸다. 서점에 들러 지브리 악보까지 샀다. 두 시간이면 한 곡 정도야 완성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 확신은 십 분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손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겹겹이 쌓인 음표를 단번에 읽는 능력도 잃어버렸다.


  뜬금없이 좌우명을 이야기하자면 '과거의 성취에 얽매이지 말자'다. 지금은 그 좌우명이 꺾이는 순간에 맞닥뜨린 게 분명했다. 언제나 특기를 피아노라고 적었다. 열 살 때는 전국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다는 자랑을, 중학생 때는 예술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했다는 자랑을 소중히 품고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손을 갖다 대기만 하면 자동으로 곡이 튀어나오리라는 상상을 하며 지냈다. 주변에 피아노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수백 번 치던 흑건으로만 치는 곡도 유려하게 완주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과거의 성취에 얽매이고 말았던 거다. 그랜드 피아노를 빌리기 위해 낸 돈은 시간당 만 원이었고, 합쳐서 이만 원을 낸 나는 낸 돈을 아까워하며 씁쓸해했다. 다음부터 피아노를 치지 말아야지, 영영 피아노를 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피아노 덮개를 덮는데 울컥했다. 취미이자 특기인 피아노가 나를 떠났다. 차라리 방금 떠나면 작별 인사라도 할 텐데, 손가락을 보건대 떠난 지 한참은 흘러 보였다.


  하나의 악기를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는 기쁨을 이미 알아버린 어른이니 결국 집 근처 피아노 학원에 들렀다.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고 싶다고 말하자 어느 정도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선생님은 레슨 없이 방만 빌려 피아노를 연습하는 건 어떻냐는 제안을 주었는데, 거기서 못 친다고 말하기 싫은 자존심이 생겨버렸다. 레슨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그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나는 제안이 좋다며 나중에 등록하러 오겠다는 거짓말을 내놓고 집으로 향했다. 피아노를 못 쳐요, 옛날엔 잘 쳤는데 지금은 치지 못해요, 사실 옛날에 잘 친 것도 엄청 옛날이에요, 지금은 체르니부터 다시 천천히 배워야 해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내가 안쓰러웠다. 선생님 앞에서 피아노 멋을 부린다며 뻔뻔하게 거짓말했다는 사실이 초라했다. 피아노를 미워하다가 나를 못마땅해했다.


지나간 음계와
어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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