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맞는 일
20.
신생아는 하루에 열여섯 시간 정도를 잔다고들 한다. 수면 시간으로 따지면 서른에 가까운 나도 신생아 취급을 받을 만큼 잠에 진심이다. 너무 잔 탓에 등허리가 뻐근해서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그러다가 왼쪽으로 다시 누울 만큼 잠에 진심인 나에게 잠이란 주제를 빼놓고서는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나의 잠은 아기의 잠과 다르다. 잠이 와서 자는 게 아니라 잠으로 도망치고 싶어서 택하는 결정이다. 또는 그 결정에 몸이 못 이기는 척 따라줌으로써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 눕도록 빚어진 행동이다.
사는 게 힘겨울 때 나는 그 힘듦의 원인을 파악하기보다 우선 잠을 잔다. 직장 생활이 고단했다면 저녁이든 이른 밤이든 상관없이 퇴근 후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을 청한다. 돌이켜보면 잠의 역사는 내 예상보다 길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붙어 다니던 단짝에게 절교 선언을 받았을 때도 나는 바로 잠을 잤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연합고사에 미끄러져 제주 반대편 끝자락의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을 때도 겨울잠 자듯 숨 죽이고 잤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분간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것이나 먹었고,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잤다. 글을 쓰는 학과에 입학해서 첫 소설 주제로 고른 것도 역시나 잠과 꿈이었다. 꿈에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신화 같은 단편 소설을 제출했고, 교양 수업에서는 누군가 내게 취미를 물었을 때 역시나 잠이라고 답했다. 바쁜 평일을 보냈다면 주말 중 하루는 스무 시간을 잤다. 물을 잘 마시지 않으니 화장실을 간다고 깰 일도 없었다.
방학 동안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던 때를 생각하면 잠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잠을 잔다. 요즘은 낮잠을 잘 수 있는 프리랜서로 살고 있어서 낮잠까지 합치면 못해도 열네 시간은 매일 자는 것 같다. 자고 싶은 잠이 오는 거라면, 잠이 부족해서 밀린 잠을 자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 텐데 잠이 오고 잠을 청하는 근원이 모두 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회피 성향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라는 게 잠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이유다. 잠에 들어가는 속도인 입면 시간도 점차 빨라진다. 예전에는 이렇게 빠르지 않았는데 회피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거나 할 일이 수북하게 쌓였다면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잘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한 뒤 곧장 이불을 덮는다.
잠으로 도망치고 다시 현실로 왔을 때 드는 감정은 실망에 가깝다. 나는 주로 환상에 기반한 꿈을 꾸기 때문에 그 꿈에 더 오래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잠이 깨는 와중에 억지로 눈을 부득부득 감은 적도 있다. 일어나면 다가오는 현실이 밉고, 그 현실이 지루하거나 재미없을 때도 나는 현실에서 재밌는 걸 찾기 이전에 우선 잠을 잘 수 있는 체력인지를 확인한다. 너무 많이 자면 자고 싶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잠을 잘 수 있다면 잔다. 잘 수 없다면 누워 미적거리며 시간을 끈다. 잠을 줄이고 싶어 하는 어떤 이는 잠을 자면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아깝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그 특징을 장점으로 여긴다. 시간이 모조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잠을 잔다. 만일 일주일 뒤 하고 싶은 중요한 일정이 있다면 그 일정까지 순식간에 끝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잠을 부른다. 일어났는데 고작 한 시간이나 두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면 안타깝다는 뜻의 한숨을 내쉰다.
잠은 죄가 없지만, 가위에 눌리지 않는 이상 무척이나 평온한 밤을 선사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잠을 줄이고 싶다. 내 상태는 회피성 잠일뿐더러 과수면이라는 걸 잘 알아서일지 모르겠다. 현실에 발을 단단하게 딛기 위해서는 현실과 현실의 나를 더 아껴야 한다. 그래도 간간이 쏟아지는 잠을 막을 도리는 없어서 그럴 때는 알람을 켜고 잠을 맞는다. 늘 성공하지는 못한다. 재빠르게 알람을 끄고 다시 달콤한 잠에 나를 욱여넣는다. 이대로 하루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는 잠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데, 완벽하게 일을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도리어 잠으로 미루게 되는 성향은 사라지게 만들고 싶은데 번번이 실패한다. 잠이 너무 많은 내가 힘들다.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오는 잠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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