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의 정책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
19.
저녁 먹기에도 이를 시간에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며 토퍼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마땅히 끌리는 게 없었다. 책도 영 눈에 들어오지 않고, 평소에는 재밌게 즐기던 게임도 질렸다. 꼭 이럴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기분에 잠식되어서 꽁해질 때. 혼자 노는 건 그만하고 싶은데, 사람들 사이에 끼여 한껏 분위기를 띄우는 일은 피하고 싶을 때. 해지는 순간에 맞춰 찾아오는 이 감정은 어떻게 보면 외로움이나 헛헛함과 비슷하다. 그런데 홀로 있겠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약속을 거절해 혼자를 자초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외로움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외로운 걸 어떡하나. 어느 때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고민해 봤더니 종일 집에 혼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날에 유독 잘 느껴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이 마음을 천천히 남긴다. 함박눈이 쏟아질 만큼 시린 날씨지만 애정 어린 온기와 선물로 마음만은 훈훈해지는 연말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요즘 기분이 날카로운 데다가 사소한 농담에도 깊은 상처를 받을 만큼 연약해진 상태라 연말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캐럴을 틀기는 하는데 혼자 듣는다. 연말 엽서를 쓰지만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나다.
다른 사람들은 “바빠서 연말 기분을 못 느껴요!”라는 글을 올리던데, 나도 따라 해볼까 싶어 괜히 노트북을 만져보지만 딱히 할 일은 없다. 일을 굳이 만들자면 만들 수는 있지만 프리랜서로서 부탁받은 작업은 하나도 없어서 이게 일이 맞는지 의심이 간다. 문득 프리랜서들이 모인 캠프에 갔을 때 한 디자이너분께서 질문한 기억이 난다. 그는 “불안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라 물었고, 내가 “그런 건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답했던 것도. 왜 그랬을까. 긍정적인 답장을 건넬 수 있을 텐데. 삐뚤어진 마음이 그분의 기대감을 저물게끔 만들었던 것 같다.
프리랜서는 불안하다. 아니다. 프리랜서만 불안한 건 아닌 것 같다. 굳건하게 출근하는 직장인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규직도 나만큼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회사를 다니든 집에서 일하든 간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그러니까 소속이 되어도 소속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의 공통점을 찾자면 ‘내게 꼭 맞는 일을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아니려나. 반드시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 같을 때, 인수인계 몇 번이면 충분히 대체될 것 같을 때. 단순한 일이 차지하는 비율이 적다면 괜찮지만, 그 비율이 점차 늘어날수록 불안감을 느꼈다. 회사를 그만둔 가장 큰 이유 역시 이런 거였다. 어느 날 내가 사라져도 다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바통을 이어받을 게 뻔한 소소한 일을 하는 게 지쳐서. 그런데 회사를 그만둬도 그만둬서 불안하다.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진중한 대화를 나눌 때 외로움이 덜해지기도 하지만, 나만 할 수 있는 일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일을 할 때 느껴지는 든든함이 있다. 친한 언니나 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보다 나를 위한 일을 성실하게 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걸 보니 오늘의 헛헛함은 ‘어디에도 나를 위한 일이 없는 기분’으로 이름 지을 수 있겠다. 세상에 살면서 오로지 나만 좀처럼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슬픔이 커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한산하게 여유 부리는 것 같은 울적함이 자라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세상에 나만 남겨질 것 같은 확신이 드는 날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디에도
나를 위한 일이 없는 기분
⟪내가 너무 싫은 날에⟫에서 전문을 만나보세요! 이번 화는 책에서 다른 꼭지로 대체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