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을 거부하는 여성에게 붙는 수사, 이기적이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을 읽고 싶어 졌다. 두 해 전인가, 한 페미니즘 강의에서 사라 아메드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행복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만든 행복의 이미지에 끊임없이 자신을 빗대게 함으로써 개인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한 사회가 공유하는 행복의 이미지는 결국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 존재에게 슬픔과 실망을 준다.
<다른세계에서도>는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다른 인식들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억압하는 사회의 폭력성을 폭로한다.
이 소설은 소설 속 화자인 내가 임신해서 결혼을 하는 나의 동생 해수의 아기, 그러니까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소설에서 나는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죄책감을 비판적으로 본다. 아직 덩어리에 불과한 배아를 아기의 형상으로 인식하는 이에게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조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소설 속 화자 나의 선배 언니는 임신 중지를 선택하는 여성이 낙인 받지 않으려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낙태죄 반대를 주장하는 집단에서조차 그렇다.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강조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조함으로써 낙태죄 합헌에 대한 공감을 유도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여성의 자기결정이 제한되어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다만 더 나은 삶을 기대해서라거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선택은 용인되지 않는다.
소설을 읽다가 문득,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이 많은 경우 사회적 통념과 다를 경우 낙인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중지를 선택하는 여성이 자신의 선택을 지지받기 위해서는 도저히 혼자서는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없는 상황이어야만 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의 경우에는 남편의 외도나 폭력과 같은 명백한 귀책사유가 상대에게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한 임신 중지나 이혼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워킹맘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일하는 여성은 자신의 커리어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엄마라는 성역할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 엄마라는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여성을 존중할 수 있을까.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여성의 선택이 사회 통념과 다를 때 이기적이라는 수사가 붙는다. 1900년대 초부터 여성의 성적자결정권을 주장했던 나혜석의 삶이 떠오른다. 어쩐지 여성인 내가 사회통념이나 주어진 성역할과 상반되는 자기결정을 하게될 때 나혜석의 비참한 말로가 내 모습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불쑥 찾아온다.
그러므로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만든 도덕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덕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