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단편소설, 화이트호스
강화길의 거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 그의 소설은 어딘가 모르게 스산하지만 그렇다고 어둠만 있지는 않은, 그래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작은 빛 같은 것을 발견하게 한다. 복잡한 것을 복잡한 채로 그려내면서도 아주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강화길이 좋다.
강화길은 여성을 피해자 혹은 구조에 순응하는 존재로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은 구조에 종속된 무력한 존재이기만 하지 않다. 때때로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폭력을 재생산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 속 여성들은 기이한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삶의 맥락과 서사 속에서 구조의 폭력을 빗겨서 있기도 하다.
평론가 신샛별은 그것을 여성의 행위력(행위자성, agency)로, 즉 “젠더적 억압을 받는 동시에 삶의 원동력을 얻은 길을 내고 그리로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행위력 혹은 행위자성으로 번역되는 agency는 연구자로서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행위자성(agency)는 구조에 종속되어 있어 무력하게 보이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행위의 가능성을 보게 한다. 마치 답답하고 무력한 현실세계 속에서 희망을, 빛을 잃지 않으려는 몸짓 같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암울한 현실 세계일지라도 희망을 잃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설 <화이트호스>에는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그의 첫 소설은 예상 밖으로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마치 백마 탄 왕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공주처럼 대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자의적 해석은 슬럼프를 낳았다. 소설의 화자가 본받고 싶었던 선배 작가 ‘이선아’가 실종되고 화자는 이선아의 집으로 간다. 화자가 닮고 싶었던 ‘이선아’에 대해서 사람들은 과대평가된 작가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런 이선아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안목을 의심받았다.
소설에는 누군가의 말과 행동에 대한 끊임없는 외부의 시선과 평가가 반복된다. ‘이선아’에 대해서, ‘이선아’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화자의 첫 번째 소설에 대해서, 브라운 시리즈를 쓴 시인 체스터턴에 대해서, 관리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벨소리를 듣고 있는 화자에 대해서 그렇다. 화자의 첫 번째 소설에 대한 외부의 시선과 평가는 대체로 실제와 다른 것처럼 보인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왜곡과 자의적인 해석으로 가득 차 있다.
나라는 정체성은 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외부의 시선과 해석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그렇게 나의 존재는 내부와 외부의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결정된다. 무엇이 진짜 나인지 구분이 안된다. 외부로부터 과대평가된 화자는 외부의 시선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애를 쓴다. 스스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만들어진 나라는 허상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계속되면서 작가로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화자는 자기가 닮고 싶었던 ‘이선아’의 집에서 이선아의 궤적을 좇는다. 그 과정에서 밥 딜런과 스위프트의 완전히 다른 화이트호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화자는 어떤 시절에 운 좋게 자신을 공주라 부르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났었고 꽤 오랫동안 거기에 갇혀있었지만, 이제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백마 탄 왕자는 필요 없다고.
노래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끌어줄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