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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안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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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Jun 24. 2023

내안의 너 #5

크리스마스 이브의 악몽

콩이를 가지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는 와인과 함께하며 파티 기분으로 보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엔 그럴 수 없었고,

대신 예약해 둔 퓨전 이탈리안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즐겨 찾던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죠.


기분 좋게 선물도 주고받은 후 맛있게 점심을 먹고, 가볍게 걸으며 새로 생긴 서촌 카페도 갔습니다.

아직 임신 3개월 차라 배가 별로 나오지도 않았고 고통의 입덧은 거의 잠잠해졌으며,

입덧 이후 시작된 극강의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하루하루였지만 워낙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좋아하는

저였기에 종일 들뜬 채로 하루를 보내다 저녁 장소인

연남동으로 이동했습니다.


임신 전까지만 해도 고량주를 홀짝이러 자주 찾았던,

가지튀김이 유명한 중식당으로 이동해

술 없이도 맛있는 요리들을 먹으며 내년 겨울엔

아기랑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겠네,

따위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정말 추웠습니다.

영하 10도인가 그랬던 것 같아요.

온도 자체는 그냥 겨울 날씨였지만 강풍으로

이가 시리도록 추운 날이었죠.

이브날 연남동에 가면서 차를 가져가면 고생할 것 같아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했었고요.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던 와중에 길 건너에 집으로 가는 버스가 보이지 않겠어요?

네, 압니다. 임산부가 뛰면 안 되죠.

그런데 사람 마음이 날이 너무 춥다 보니 또 서두르게 되더라고요.

어, 탈 수 있을까? 하며 남편이 버스를 잡아보겠다고 앞장서 뛰었고, 저는 먼저 가보라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는데,


다음 순간 저는 길바닥에 대자로 엎어져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어이쿠,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고 남편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해서 도로 뛰어왔지요.

무슨 계란프라이 깨듯 저는 얼굴만 빼고 전신이 바닥에 부딪혔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 상태였어요.

무릎은 까졌고, 손바닥도 얼얼하고, 무엇보다 전면이 다 부딪혔으니 콩이 잘못됐을까 무서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빨리 뛴 것도 아닌데 추운 날 몸이 굳은 데다 임신 후 아직 배는 거의 나오지 않았어도 움직임이 평소 같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후를 떠올리면 얼마나 처량했는지요.

어쩐지 더 추워진 것 같은 날씨에 남편은 괜히 자기가 서둘러서 먼저 가는 바람에 제가 넘어졌다며, 콩이 잘못되면 어쩌냐고 눈물이 그렁그렁했죠. 저는 저대로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몸이 너무 아파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심 그날 새로 산 에스키모 같은 패딩을 입었었기에 배가 다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아기에게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요.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크리스마스 당일, 부리나케 산부인과를 찾아 초음파 검사를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놀란 우리에게 양수 속의 아기는 웬만한 충격으로는 다치지 않는다며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초음파 사진에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것 같은 모습이 우연히 찍혔다며 출력해 주시고는 아주 귀엽지 않냐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셨죠.


그날은 예약해 두었던 크리스마스 케이크만 받아 집에서 하루를 보내며 휴식을 취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미 탈없이 태어난 콩이와 함께 있는 지금은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악몽이었죠.


자, 우리 소중한 임산부 여러분,

항상 편한 신발을 신고 천천히 걷기로 해요.

학창 시절 걸어 다니는 마을버스였던 저지만 콩이가 뱃속에 있는 동안은 이날 이후로 사뿐사뿐 걷는 버릇을 들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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