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30일 금요일 곰민정 작업일지
고3 여름의 주말.
웬일인지 막 의욕이 불끈불끈. 이번 주말에 왠지... 카페 가서 공부하면 진도 엄청 뺄 수 있을 것 같아.
수학이 제일 재밌으니까 정석이랑 쎈수학도 챙기고, 영어도 자이 챙기고, 국어도 안 보긴 아쉬워서 챙기자. 그렇게 바리바리 가방을 챙기니 배낭이 돌덩이다. 아이고.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얼굴이 흙빛이다. 무거운 책을 5권이나 챙겼건만, 어느 하나 제대로 본 것 같지가 않다. 죽도 밥도 안 됐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무거운 배낭만큼이나 마음이 돌덩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딱 한 권만 챙길걸. 그거 하나만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이 그 그.
그림책을 하면서도 종종 이런 일들이 있다.
괜한 의욕이 불끈불끈 솟는 날에는 특히나 불안하다.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내 배낭은 또 돌뎅이가 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소지품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1. 포켓사이즈 하드커버 로이텀
: 슬쩍슬쩍 떠오르는 생각들을 캐치!
메인 노트는 매번 고민이 많다. 포켓사이즈냐, A5사이즈냐. 하드커버냐 소프트커버냐. 수많은 노트를 써본 경력 덕분에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포켓사이즈 : A6정도 사이즈가 된다. 핸드폰보다 조금 큰 사이즈이기 때문에 펜 하나랑 작은 숄더백에도 쏙 들어간다. 그래서 산책을 갈 때도 들고 다닐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기획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는 아숩다.
•A5 사이즈 : 손바닥보다 더 큰 사이즈. 글과 그림을 정돈해서 기록할 때 이 사이즈가 딱이다. 하지만 내가 맨날 들고 다니는 무지의 작은 가방에 들어가지 않고, 무게가 더 나가다 보니 들고 다니는 게 조금 더 부담스럽다.
•하드커버 : 사실상 간지가 나기 때문에 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보존이 좋다. 내가 10년 전에 쓰던 몰스킨은 아직도 짱짱하게 나의 기록들을 지켜주고 있다. (이제는 만년필 필기감 때문에 로이텀으로 갈아탔지만) 하지만 무겁다.
•소프트커버 : 가볍다. 가벼우니까 더 자주 들고 다니고 더 자주 들고 다니니까 더 자주 그리게 된다. 소프트커버는 하드커버에 비해 페이지수도 적은 편이라, 한 권을 다 썼다는 만족감이 큰 편이다. 하지만 가방에 넣다가 구겨지면 나의 마음도 좀 구겨진다.
>>> 나는 포켓사이즈 하드커버 로이텀으로 정했다.
체계적인 정리보다 언제나 들고 다닐 노트가 필요했고, 어디든 들고 가려면 내구성이 중요했다.
2. 무인양품 연습장
: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것.
어제 코끼리를 한참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정확한 형태를 이해하고 그리지 않은 상태에서 우연히 번지는 효과만 노리면 그건 옳은 방향이 아닌 것 같다. 얇은 펜 또는 연필로 섬세하게 그 형태를 제대로 익힌 다음, 우연이 주는 효과를 도모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해주셨던 수업이 생각났다. 오쏘 선생님. osso. 이탈리아어로 뼈대라는 뜻. 자기만의 모양대로 살을 붙여갈 수 있도록 탄탄한 뼈대를 함께 세워준다는 뜻. 몇 년이 흘렀지만, 그렇게 멋진 이름은 아직 보지 못했다.
선생님께 배운 건 참 많았다.
그중에서 하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 스킬, 나다운 스케치, 무엇을 그리는지에 대한 관찰, 그리고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 그리고 나의 의견을 쓴 글.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나를 만든다는 것. (집중 좀 하자. 이거 쓰다가 갑자기 숨고 등록까지 하다니… 산만하다) 그리고 양이 질을 만든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의 숙제는 특별한 건 없었다. 일주일 동안 채워올 노트 한 권을 주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글쓰기 숙제도. 그렇게 무작정 채우듯 노트를 채우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중구난방이라고 생각한 내 노트도 어떤 경향성이나 로직이 있었고, 그걸 보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소중한 노트를 이걸로 채워도 될까? 하는 한가한 고민보다는, 와… 50장 언제 다 채우지? 하는 마음으로 노트를 대하는 것이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10장은 채워야 하니까, 밀리면 이거 감당이 안되니까, 일단 손을 움직여 보다 보면 무언가 나왔던 것. 그걸 지금 다시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3. 노트북
: 이미지 서치
그림을 그리려면 실물을 보고 그려야 한다. 그 형태를 제대로 익힌 다음에 추상이 있다. 이것은 나의 다짐이다! 그러므로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나 둘 중 하나를 들고 다녀야 하는데, 아이패드는 인간적으로 넷플릭스 봐야 하므로... 집에 두고 다니자. 가끔 아이패드 드로잉을 하고 싶을 때 바꿔서 들고 다니자. 사실 가방이 가벼워지면 이거 별로 안 무겁다.
- 뺄 것 들
•모닝페이지 노트 : 이건 눈 뜨자마자 집에서 쓰자. 밖에 들고 다니지 말자. 정신 차리고 쓰면 의미 없대.
•눈사람 디벨롭 노트 : 이건 작업실에 두고 다니자.
•아이패드 : 이건 집에 두고 쓰자. 유튜브 봐야지...
내일부터 가벼운 어깨로 다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