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스터가 던진 가벼운 말에 숨어 있던 진심의 무게
“장난이야.” 그 말은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주문처럼 들린다. 방금 던진 말에 담긴 의미도, 그 말이 건드린 감정도, “장난”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가벼워진다.
하지만 정말 장난이었을까? 그 말은 정말 아무 뜻 없이 던진 농담이었을까?
나는 많은 말을 웃음으로 끝맺으며 살아왔다. 어딘가 찔리는 이야기를 꺼낸 뒤, “그냥 해본 말이야”라며 뒤로 물러서곤 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짜 무게는, “장난”이라는 외피를 씌운 무의식의 진심이었다.
감정은 종종 무거운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분노, 눈물, 침묵, 혹은 떨리는 목소리. 그러나 어떤 감정은 가벼운 말의 형태로 위장된다.
“네가 또 그럴 줄 알았어.”
“항상 그런 식이잖아.”
“이러다 나 혼자 되는 거 아냐?”
“그냥 농담이야. 신경 쓰지 마.”
이런 말들은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이면에는 기대, 실망, 두려움, 외로움 같은 처리되지 못한 감정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릴수록, 내 안의 진심은 더 깊숙한 곳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융은 트릭스터를 질서와 의미를 교란시키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일관성 없는 태도와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자아의 경계를 흔들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로를 뒤섞는다.
나는 오랫동안 관계에서 트릭스터처럼 반응했다. 상대에게 직접 상처 주고 싶지 않을 때, 내 감정을 드러낼 용기가 없을 때, 나는 농담을 선택했다.
그건 방어였다. 진심을 말하고 거절당하는 게 두려웠고, 내 감정이 무겁다고 여겨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진심을 건네고, 웃으면서 감정을 회피했다.
상대는 종종 이렇게 되묻는다.
“그 말, 진심 아니지?” 그 질문 속에는 당황함, 상처, 불신이 섞여 있다.
나는 늘 그 질문 앞에서 “아니야, 진짜 장난이었어”라고 답했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에서는 그 질문이 내 진심을 들킨 것 같아 오히려 안도하기도 했다.
내 무의식은 그렇게 가벼운 말 뒤에 숨은 감정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냥 너한테는 기대를 안 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상대는 조용히 웃었고, 나도 웃으며 넘겼지만, 그날 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잠들지 못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건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가 듣기를 원하지 않는 말이었고, 나조차 듣기 싫은 나의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말이 되기엔 너무 날것이었고, 그 날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농담이라는 옷을 입혔다.
감정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도착한다. 그리고 언어가 준비되기 전, 무의식은 감정을 이상한 문장, 어울리지 않는 유머, 혹은 상황에 맞지 않는 조롱으로 내보낸다.
트릭스터는 이런 순간을 즐긴다. 말은 장난처럼 흘러가지만, 그 말이 남긴 잔향은 진지하고 깊다.
나는 이제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던진 말, 상대의 얼굴, 내 가슴에 남은 묘한 떨림.
그 감정들은 나에게 말하고 있다.
“방금 그건, 네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야.”
“너는 지금 너를 드러낸 거야.”
나는 이제 농담을 더 조심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반응이 아니라, 내 말의 출처가 어디였는지를 돌아본다.
내가 던진 말이 진심인지, 방어인지, 복수인지, 아니면 애정인지. 그 말을 만든 감정의 진실을 먼저 듣고 싶다.
그래서 때로는 농담을 멈추고 말한다.
“사실 좀 서운했어.”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되게 작아져.”
“웃으면서 말했지만, 진짜는 그게 아니었어.”
그 순간, 관계는 조금 어색해질지 몰라도 나는 내 감정을 잃지 않게 된다.
감정을 드러내는 게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무의식은 농담을 활용한다. 무게를 줄이고, 책임을 피하고,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그러나 감정은 진심을 말해주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관계의 거리, 반복되는 불쾌감, 혹은 대화 이후 오래 남는 잔상으로.
이제 나는 내 말을 이렇게 의심한다.
“방금 그 말, 혹시 진심 아니었어?”
“왜 그렇게 웃으며 말했지?”
“무의식은 뭘 말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나를 감정의 가장자리가 아닌, 감정의 중심으로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