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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위의 불꽃

웃음과 울음 사이, 무의식이 불쑥 건네는 감정의 반전

by 석은별

웃어야 할 순간인데, 눈물이 났다. 울어야 할 타이밍인데, 나는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감정이 뒤집힌 그 순간, 나는 당황했고,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너의 반응이 아니라, 나의 장난이야.”

나는 그제야 눈치챘다. 감정은 언제나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감정에는,익숙하지 않은 존재—트릭스터—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감정의 장난을 시작한 것은 나였을까

우리는 감정을 관리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예의 있게 반응하며,상황에 맞는 감정을 선택한다.

그러나 감정은 자주 도망친다. 웃음 속에 울음을 감추고,화내야 할 자리에 침묵을 얹고,슬픔을 농담으로 흘려보낸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이건 왜 이런 반응일까?”를 자문했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거였다.
“지금 이 감정은 정말 나의 것인가?”


종이배 위의 불꽃 – 무의식의 반전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작은 개울 위를 종이배 하나가 둥둥 떠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조그마한 촛불이 하나 타고 있었고,그 촛불은 꺼지지 않은 채 물 위를 부유했다.

그 장면은 이상하게도 강렬했다. 위태로운 평형, 불이지만 물에 빠지지 않는 존재, 언제 꺼질지 모르는 긴장감.

그건 딱, 내 감정 같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면서도 언제나 웃고 있는 척하는 나.

감정을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하지만, 애써 절제된 불빛으로 버티는 존재.


트릭스터는 웃고 있지만, 진심은 울고 있다

트릭스터는 융이 말한 무의식의 장난꾼이다. 그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등장해 자아를 흔들고, 방향을 바꾸며, 기존 질서를 교란시킨다.

내 감정 속의 트릭스터는 늘 이중적이었다. 웃음으로 울음을 덮고, 침묵으로 분노를 감추고, 농담으로 진심을 가장했다.

특히 가까운 관계 안에서 나는 종종 트릭스터처럼 반응했다.

화가 나도 “괜찮아”라고 웃고, 상처받고도 “아냐, 웃긴 일이었어”라며 농담했다.

그러나 그 농담 뒤에는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있었고, 그 웃음은 감정을 숨기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위장 수단이었다.


무의식이 말을 걸 때, 감정은 이상하게 흐른다

트릭스터는 감정을 엉키게 만든다. 말로 표현된 것과 실제 느낀 것이 다르게 보일 때, 그곳에는 반드시 트릭스터의 장난이 숨어 있다.

나는 회의 자리에서 농담처럼 “요즘 너무 바빠서 죽겠어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끝난 뒤, 이상하게 슬펐다. 그건 웃음이 아니라 무의식의 울음이었기 때문이다.

트릭스터는 종종 무의식이 보낸 ‘말장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말은 종이배 위의 불꽃처럼 위태롭게 감정을 태우면서도, 절대 꺼지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신호를 보낸다.


감정은 타이밍보다 진심이 중요하다

감정은 상황에 맞는 반응을 강요받는다.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하고, 축하 자리에서는 웃어야 한다.

그러나 내 감정은 그 시간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했고, 즐거운 자리에서 위축되었고, 감정이 일어날 타이밍과 감정이 실제로 도착하는 시간이 어긋나 있었다.

그 어긋남이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틈을 무의식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순간, 감정은 이상한 방식으로 터진다. 웃음이 울음이고, 침묵이 절규가 되는 이상한 감정의 반전 속에서, 우리는 진심과 타이밍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웃음과 울음 사이, 그 좁은 틈에 내가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감정을 ‘고쳐 쓰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포장하고, 때론 유머로 전환해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웃음 속에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건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던 나였고, 불안했지만 인정받고 싶었던 나였고,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태우고 있던 나였다.

나는 더 이상 웃음으로 감정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울고 싶으면 울고,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무의식의 장난에 휘둘리기보다 그 장난을 해석해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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