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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무게를 짊어진 아이

감정의 균형을 지키려 했던 내면 아이의 책임감과 고통

by 석은별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아이였다. 집안이 시끄러워질수록, 나는 더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감정이 폭발할 때마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고, 그 누구도 나를 걱정하지 않도록 더 씩씩하고, 더 다정하게 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부터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짊어지고 있었다. 내가 감정의 무게 중심을 잡아야 세상이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가정의 기압계처럼 작동했던 아이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주시하고 있었다. 엄마의 눈빛, 아빠의 표정, 가족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 그 기류가 요동치기 시작하면, 나는 먼저 움직였다.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거나, 농담을 던지거나, 자리를 피하거나, 자신을 작게 만들었다.

이런 방식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침 받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존재가 가족의 감정 기압을 조절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체득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였지만, 가정의 기상관측소처럼 굴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폭우가 되지 않도록, 누군가의 분노가 번개처럼 치지 않도록 내 안에서 먼저 조절하고 흡수했다.


감정의 무게를 가장 늦게 인식하는 사람

‘감정의 무게를 짊어졌다’는 말은,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선택했다는 뜻처럼 들린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선택’한 적이 없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고, 가족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암묵적인 역할이었다.

그래서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나는 내 감정의 무게를 가장 늦게 인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들의 감정은 민감하게 읽어내면서도, 정작 내 감정은 무시했다. 내 고통은 미뤄두었고, 내 분노는 사라진 것처럼 다루었다.

나는 내가 ‘조용해서 편한 아이’였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내 존재의 가치인 줄 알았다. 내가 감정을 말하면,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불편해지는 걸 느꼈고, 나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참으면 되니까"라는 마법의 주문

나는 자주 이 말을 되뇌었다.
“내가 참으면 되니까.” 이 문장은 나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듯했지만, 실은 감정을 억누르고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어느 날, 상담 중에 한 내담자가 말했다.
“저는 그냥 어릴 때부터,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된다고 느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건 분명 나의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억눌렀던 것이고, 그 억눌림이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자기 감정을 느끼는 법조차 잊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누구의 감정도 무겁지 않았지만, 모두 내 어깨 위에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늘 바빴고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에서 안정을 찾으며 자랐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집안의 정서적 중심을 떠맡은 존재가 되었다.

누구도 내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은 없지만, 누구도 나에게 “너는 괜찮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준 적도 없었다.

어른들은 저마다 사는 데 바빴고, 아이인 나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놓치고 있던 감정의 공백을 메우려 애썼다.

나는 울고 싶을 때도 울지 않았고, 속상할 때도 괜히 웃었다. 나의 감정은 한 번도 무게 중심에 있지 않았다. 나는 늘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내는 존재였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감정을 짊어지는 아이는 늙은 아이가 된다

내면에서 자란 그 아이는 어른이 되기 전부터 늙었다. 그 아이는 어른들보다 먼저 현실을 파악했고, 감정보다 상황을 우선시하며, 늘 조심하고 판단하고 방어했다.

그렇게 늙은 아이가 된 나는, 감정 앞에서 늘 망설이는 사람이 되었다. 기뻐도 쉽게 웃지 못하고, 화가 나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 아이는 정서적으로 ‘성숙한 아이’였지만, 심리적으로는 철저하게 고립된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늦게라도 말을 건다

나는 요즘 그 아이에게 자주 말을 건다.
“너는 참 대단했구나.”
“어릴 때부터 그렇게 버티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는 네 감정을 먼저 말해도 괜찮아.”

그 아이는 처음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침묵해온 탓에 자신의 감정을 말해도 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내가 그 아이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따뜻하게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 그 아이는 아주 작고 느린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감정의 무게는 나눌 수 있다

그 아이가 말한 첫 문장은 이랬다.
“나는 사실, 무서웠어.”
“누구 하나라도 감정을 폭발시키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거든.”

나는 울었다. 그 아이의 두려움이 너무 오래, 너무 조용히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안다. 감정의 무게는 ‘혼자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감정까지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네가 조율하지 않아도 돼. 이젠,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도 되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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