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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표정,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 얼굴의 언어

by 석은별

우리는 때때로 어떤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표정은 생생히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무심히 돌아섰던 뒷모습, 입꼬리가 일그러졌던 순간은 마치 영상처럼 마음에 박혀 있다.

기억은 흐려져도, 표정은 남는다. 그리고 그 표정은 감정의 입자처럼 내 안에 남아 시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진실로 존재한다.



표정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감정은 종종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말보다 더 빠르게, 더 정교하게, 더 깊이 스며든다. 우리가 무심코 마주한 표정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어릴 적, 어른들의 말보다 그들의 표정을 더 먼저 읽었다. 엄마가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그 표정. 아빠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눈을 피했던 그 순간. 그 말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표정들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

표정은 감정의 직접적인 흔적이며, 그 흔적은 종종 감정보다 오래도록 감정의 증거로 남는다.


그날의 표정이 내 안을 지배할 때

상담 중, 나는 종종 내담자의 표정을 본다. 말은 단정하지만, 입가에는 지친 미소가 흐르고, 말투는 밝지만 눈동자는 깊은 피로에 젖어 있다. 그럴 때 나는 안다. 그 사람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잘 웃었고, 괜찮다고 말했고, 감정을 조율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타인의 표정 하나가 내 안에서 억눌려 있던 감정을 불쑥 꺼내곤 했다.

특히 어떤 표정은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지적당할 때의 냉소적인 시선, 거절당할 때의 무심한 얼굴, 부정당할 때의 가벼운 비웃음.

그 표정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응고되어 있던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감정은 ‘기억’이 아니라 신체 반응으로 되살아났다.


표정이 호출하는 감정의 리듬

표정을 떠올리면, 감정이 되살아난다. 감정이 되살아나면, 몸이 반응한다. 그 반응은 말보다 빠르고, 더 깊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이유 없이 울컥하거나, 과하게 위축되거나, 불쾌감이 길게 남았다. 그 감정들은 종종 사소한 자극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이전의 어떤 표정이 불러낸 감정의 메아리였다.

그날의 표정이 지금의 감정을 지배할 때, 우리는 감정의 현재와 과거를 혼동하게 된다. 감정은 지금 발생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감정이 지연된 방식으로 도착한 것이다.


표정을 해석하는 자아 –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표정을 기억하는 자아는 과거의 상처 입은 자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 표정은 ‘당한’ 감정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고, 나는 그 감정을 해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상담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성찰자로서 살아오며 나는 표정이 감정의 원인이 아니라 감정의 흔적이며 통로라는 사실을 배웠다.

내가 기억하는 그 표정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공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도 나름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을 수 있고, 내 해석이 상처의 필터를 통해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이 나에게 남긴 감정은 실재였다. 그것은 부정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정서적 체험이었다.


나는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감정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데 익숙한 나는, 늘 ‘타인의 표정’을 분석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묻는다.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웃고 있었을까? 얼굴이 굳어 있었을까? 입술을 깨물며 말 없이 참았을까?

그 표정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내 감정의 진실을 다시 만난다. 말하지 못했던, 그러나 몸은 기억하고 있었던 감정.

그 표정을 기억하는 일은 감정을 다시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시작이다.


감정은 얼굴을 통해 기록된다

감정은 뇌에서 시작되지만, 그 흔적은 표정과 근육에 남는다. 이마의 주름, 입가의 긴장, 턱선의 경직. 감정을 오랫동안 눌러온 사람일수록 표정은 점점 ‘굳어지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감정을 자각하고 풀어내면, 표정은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진다. 몸의 근육이 변화하고, 얼굴의 리듬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정서적 진전을 상징한다.

표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감정을 회복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상담실에서 말보다 먼저, 표정을 본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말보다 먼저 떠오르는 표정을 인식한다.

그날의 표정이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표정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 나는 그 표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감정을 다시 호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표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감정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을 되찾는 사람은 다시 자기 얼굴을 회복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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