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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문, 열리지 않는 서랍

억압된 감정은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

by 석은별

나는 반복적으로 꿈을 꾸었다. 낯선 집, 차가운 복도, 그리고 그 끝에 놓인 닫힌 방문. 그 문을 열려고 다가갈 때마다 누군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거긴 열면 안 돼.” 낯선 목소리였으나 묘하게 익숙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 꿈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그 문은 내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의식적으로는 잊고 지냈지만, 감정은 여전히 그 방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감정을 넣어두는 방식, 그리고 봉인의 구조

우리는 고통스럽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만났을 때, 그것을 ‘지금’이 아닌 ‘나중’으로 미루는 방식을 택한다. 이때 감정은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내면 어딘가에 봉인된다.

융 심리학에서는 이 과정을 ‘억압(repression)’이라 말한다. 억압은 감정의 소멸이 아니라, 감정의 ‘보류’다. 감정을 수용할 내적 공간이나 인식의 여백이 부족할 때, 의식은 그 감정을 안전하게 봉인한다.

문제는, 그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종종 몸의 증상, 감정의 반복, 관계의 충돌로 나타난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열리지 않는 서랍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내면의 감시자 – “그건 열면 안 돼”

서랍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감정을 넣어두도록 압박하거나, 그 감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린 내면의 감시자가 존재한다.

그 감시자는 부모일 수도 있고, 학교나 사회가 부여한 도덕 기준일 수도 있으며, 어릴 적 형성된 수치심의 화신일 수도 있다. 그 감시자는 속삭인다.
“그런 감정은 품위 없어.”
“울면 지는 거야.”
“그건 다 지나간 일이잖아.”

나는 그 감시자의 목소리를 너무 오랫동안 내 목소리로 오해해 왔다.


내가 닫은 문 – ‘기억’보다 강한 ‘느낌’

내게도 열지 않은 방이 있었다. 그 방에는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억’을 명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 대신 몸이 반응했다. 갑자기 가슴이 조이고, 상대의 목소리 톤에 과도하게 예민해지고, 모욕이나 배신에 대한 과잉 반응이 반복되었다.

그 방은 내 의식이 아닌, 내 감정의 리듬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아버지에 대한 건 이미 정리되었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그 말은 ‘기억의 삭제’일 뿐, ‘감정의 소멸’이 아니었다. 그 감정은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생생한 진실이었다.


감정은 문을 열기 전까지 나가지 않는다

억압된 감정은 그 자체로 강력한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의식에 포섭되지 않으면, 반복되는 갈등이나 무의식적 방어로 삶을 왜곡시킨다.

그 문을 열지 않으면, 나는 그 방에 갇혀 있는 아이를 평생 꺼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의 일상에서 계속해서 도움 요청을 보낼 것이다.

나는 어느 날, 결심하고 그 문을 열었다. 그 문 안에는 격렬한 장면이나 폭력적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울음을 들어주지 않았던 작고 말없는 아이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나였다. 울음을 삼킨 채 오랫동안 조용히 그 방을 지키고 있었던 상처받은 감정의 형상이었다.


감정은 해소가 아닌, 인정의 대상으로

감정은 이해되지 않아도 된다. 그 감정이 정당하든, 과하든, 불완전하든, 그 존재 자체가 인정되어야 한다.

나는 그 아이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어떤 해석도 시도하지 않고, 그 어떤 위로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함께 있었다.

그 순간, 감정은 흐르기 시작했다. 말이 아닌 공기처럼. 울음이 아닌 진동처럼. 감정은 ‘이해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기억의 서랍을 여는 또 다른 방식 – 글쓰기

며칠 뒤, 나는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미완성 문장들이 있었다.
“이건 지금은 쓰지 못하겠어.”
“누가 보면 안 되니까.”
“언젠가는 괜찮아지면, 그때 꺼내볼게.”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언젠가’를 지금으로 데려왔다. 그 문장을 다시 읽고, 그때의 나를 품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제 괜찮아. 지금은 열어도 되는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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