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언어가 되기 전, 리듬으로 흐른 슬픔
사람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울음을 배운다. 생명이 세상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아기는 폐가 열리는 첫 호흡과 함께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첫 표현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원초적인 리듬이다.
그런 의미에서 울음은 감정의 최초 언어이며,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이 몸을 통해 터져 나오는 방식이다.
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 여겨져 왔다. 영화를 보며 눈물짓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울컥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작 나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나는 울음을 억눌러온 사람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내면에 새겨온 명령은 명확했다.
“참아야 한다.”
“눈물은 약한 것이다.”
“울면 누가 위로해 주는가.”
그런 메시지는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가족의 분위기, 주변 어른들의 반응,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나의 ‘강함’이라 믿었다.
어느 날, 내담자 한 사람이 상담 도중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요.”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숨이 막혔다. 상담을 마치고 혼자 앉아 있을 때, 묘한 두통과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그날 밤, 이유 없이 울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의 눈물은 내가 흘리지 못한 울음이었고, 그 감정은 내 안에 묻힌 채 설명되지 않은 고통이었다.
울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억눌려 있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울었다.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울었다. 그 울음은 언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눈물과 함께 흐르는 리듬, 떨리는 숨결, 가벼운 진동, 그리고 처음으로 '나도 아팠다'고 인정하는 몸의 반응이었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발적 상징화(spontaneous symbolization)는 감정이 언어를 거치지 않고 이미지나 신체 반응으로 표현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내 울음은 그 상징화의 첫 순간이었다.
그 감정은 말이 아니라 리듬이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한 감정의 파동이었다.
나는 상담가로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감정의 구조를 해석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날의 울음은 어떤 해석도 거부했다. 그저 흘렀다. 그것은 ‘감정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아니라, ‘감정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감정은 반드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냥 흐르게 두는 것이, 그 감정과의 첫 만남일 수 있다.
울음은 감정이 언어가 되기 이전, 몸의 리듬으로 먼저 나타나는 존재의 표현이다.
아기가 처음으로 울었을 때, 그 울음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울음이 우리 삶에 결정적인 출발점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흘린 그날의 눈물은 어쩌면 내가 다시 처음으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다시 배우는 것, 감정을 느끼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 그것이 나의 두 번째 탄생이었다.
사회는 울음을 부정한다. 특히 여성의 울음은 감정적이고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고, 남성의 울음은 나약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심리학은 말한다.
울 수 있다는 것은 회복의 전조다.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기감정을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다.
나는 그날 울면서 처음으로 내 감정의 파장과 리듬을 느꼈다. 감정은 설명보다 느낌으로 시작되며, 그 느낌은 삶을 다시 살게 만드는 움직임이 된다.
상담에서 종종 만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화나는 일은 많은데, 정작 눈물은 안 나요.”
“그냥 공허하고, 아무 감정도 없어요.”
그들은 감정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감정과 단절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 단절의 시작은, 어린 시절 감정이 거절당한 경험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 정도 일로 왜 울어?”
“그건 네가 잘못한 거잖아.” 이런 말들이 반복될수록, 감정은 내면에서 폐쇄된다.
울 수 없는 사람은 고장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너무 오래 감정을 홀로 지켜온 사람이다.
이제 나는 감정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처음엔 비문이었다. 맥락도 없고, 논리도 없고, 그저 ‘느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비문은 울음과 마찬가지로 정직했고, 거기서부터 감정의 언어가 시작되었다.
감정은 울음에서 시작되고, 그 울음이 감지되면 비로소 삶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도 종종 울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울 수 있는 날도 있다. 그 울음은 나를 흔들지만, 결코 나를 망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