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심연에서 처음으로 피어난 생명의 언어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 말라붙은 감정의 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장소였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만으로도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심연이었다.
상담가로 살아가며 타인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정작 내 감정은 오랫동안 외면당한 채 남겨져 있었다. 겉보기엔 무리 없이 살아가고 있었고, 일도 잘해냈으며, 인간관계도 나름 원만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나도 알 수 없는 무감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기뻐도 웃지 않고, 슬퍼도 울 수 없는 상태. 마치 삶의 진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꿈에서 한 장면이 반복되었다. 폐허처럼 무너진 공간 한가운데 작은 나무 하나가 자라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강렬한 감정의 메아리를 안겨주었고, 그제서야 나는 내 안에 어떤 생명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기억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 기억에 응답하는 감정이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적 진실이다.
나는 오래된 기억을 의도적으로 꺼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지우려 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 기억을 ‘피해 갔다’. 하지만 감정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감정은 매일의 일상 속 관계와 상황에서, 의식의 조명을 피해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담을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한 장면이 있었다. 유년기의 어느 순간, 나는 외로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 어른들의 격한 말다툼, 그리고 고요한 침묵. 그 장면 속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울지도 못했다.
그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그건 현재도 내 안에서 영향을 미치는 감정의 씨앗이었다.
기억을 통해 소환된 그 감정은 의식이 붙잡기 전에 이미 몸에서 반응하고 있었다. 가슴이 조이고,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막히는 듯한 반응은 ‘그때’의 감정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몸이 그 기억을 얼마나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융이 말한 ‘그림자’는 억압된 감정의 보고이며, 무의식 속에 자리한 자아의 한 조각이다. 그 그림자는 무서운 것이 아니다. 단지, 아직 말해지지 못한 감정일 뿐이다.
꿈속에서 마주친 나무는 단지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안의 감정을 방치해왔는지를 상기시키는 상징이었다. 나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았지만 자라고 있었고, 나는 그 나무가 내 안의 감정임을 직감했다.
그 나무는 '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상처받고 외면당한 채 내면에 남겨져 있던 아이 자아였다. 그 아이는 단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존재였고, 나는 그 존재를 너무 오랫동안 외면해 왔다.
그제서야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미안해. 널 그렇게 오래 혼자 두었구나.” 그 말은 내 감정의 봉인을 푸는 첫 열쇠가 되었다.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 무뎌질 거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감정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이름 붙여지고, 경험되어야 한다.
내 감정은 무감각의 형태로 잠들어 있었지만, 그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나무라는 상징과 아이 자아와의 재회 덕분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장이 나를 치유했다. 말이 아니라 문장으로 감정을 구조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리듬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감정은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라, 매일 들여다보고, 돌보고, 듣고 써야 할 것이다.
그 감정의 생명력이 나를 움직인다. 나는 지금도 매일 아침, 내 안의 나무에게 물을 준다. 그 물은 글이 되고, 눈물이 되고, 고요한 침묵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