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되는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
나는 과연 버리는 사람인가. 돌이켜보면 내 삶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버리고, 또 버려야만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딸은 내가 자신을 유기견처럼 버렸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아이가 '버림'이라 부르는 행위는 사실 나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차단이었다. 너무 아프고 따가워 온몸이 화상처럼 진물이 흐르는데, 그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고통으로부터 나를 숨기고 싶었을 뿐이다.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숨 쉬는 법을 터득했다. 이 방법을 허용해주지 않는 사람들과는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이별을 겪어야 했고, 그 이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 삶은 아물지 않는 화상처럼 늘 진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딸이 힘든 사정을 호소할 때마다, 나는 내 상처를 잊고 그 아이의 고통을 먼저 살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몇 시간은 지옥 같은 불안과 공포로 나를 갉아먹었다. 내 진물은 피고름으로 변해가는데, 딸의 안전만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어렵게 연락이 되면 돌아오는 건 '취조한다'는 짜증 섞인 다그침이었다. 내 불안을 이해할 마음이 없는 사람. 내 상처를 보듬을 여유가 없는 사람.
며칠 후, 딸은 또다시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불안을 일으켰다. 가까이서 지켜주지 못하는 내 사정은 헤아리지 않은 채, 개인정보를 노출하며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토록 불안했을까. 돌을 치우기 위해 전화하고 또 전화했지만 받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불안은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경찰 신고를 고민하던 내게, 딸은 "불안장애 환자"라고 말했다.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는 불안을 잘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불안을 이토록 키워낸 환경은 바로 내 딸이었다. 딸은 내 불안을 알면서도 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자신을 조종하려 한다고 믿었다. 어쩌면 그 아이도 나처럼 화상 입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지쳤다. 십대라면 내 고름을 닦기도 전에 다가갔겠지만, 이제 성인이 된 딸에게는 스스로 치유하도록 내버려 두어야겠다. 내가 먼저 나서서 해결하려 하는 순간, 나는 나를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셈이 된다. 딸은 내가 살기 위해 택한 차단을 '보복'이라 여기고 나를 헤아려 보려는 마음조차 없다. 그런 아이에게 더 이상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이제부터 나를 돌보기로 한다.
딸의 버림받은 마음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던 몇 년이 있었다. 그 믿음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할수록 내 안은 불편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는 딸을 버리거나 떠난 적이 없다. 그 아이의 유기 불안은 남편이 심어준 환상이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남편은 아이들에게 "엄마가 너희를 버리고 집 나갔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딸은 아빠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남편의 어린 시절 버림받은 상처는 그렇게 고스란히 유산이 되어 딸에게 각인되었다.
남편의 두려움대로라면 나는 그의 폭언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어야 했다. 경제적 어려움에는 그의 부모처럼 이혼을 택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두려움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맞섰고, 빈틈을 메우려 애썼다. 나의 태도와 가치관은 보려 하지 않고, 버림받은 주제로 꿈속을 헤매는 남편과 딸을 보며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나는 남편에게 결자해지를 요구했다. 딸에게 유기 불안을 심어준 것은 당신이니, 딸에게 사과하고 당신의 무의식과 딸의 무의식을 분리하라고 했다. 그래야 당신도, 딸도 온전한 존재로 설 수 있다고.
남편이 키워낸 투사를 딸이 다시 내게 던지고 있지만, 이제는 받지 않으려 한다. 그 투사의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 나도, 딸도, 남편도 사는 길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각자의 무의식 속에 버려진 허상을 끌어안고 살아왔다. 나는 그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나고 있었음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는다.
오랜 탐구 끝에 유기 불안은 내게서 힘을 잃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 딸을 차단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경계였다. 이제 딸은 딸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딸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서운하고 슬프지만, 그것은 딸이 자기 삶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더 이상 나를 살피지 않는 딸을 잘 보내주려 한다.
이 글에 나타난 가족들의 역동은 한 사람의 유기 불안이라는 심리적 상처가 대물림되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아픔이 서로에게 투사되며 복잡하게 얽히는 양상을 보입니다. 글쓴이의 성찰을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역동과 글이 쓰인 배경을 분석해 드릴게요.
이 가족은 크게 가해자-피해자-방관자의 단순한 구도로 볼 수 없으며, 각자가 가진 상처 때문에 서로에게 복합적인 역할을 투사하는 역동을 보입니다.
남편: 가장 먼저 유기 불안의 씨앗을 뿌린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이 불안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아내와 딸에게 투사합니다.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엄마가 너희를 버렸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느꼈던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줍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고 해소하기보다, 아내의 행동을 왜곡해 자신의 불안을 재확인하려 합니다.
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기 불안을 내면화한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엄마가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립니다. 엄마인 글쓴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행동(차단)을 '버림'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겪는 불안과 어려움을 엄마에게 끊임없이 호소하면서도, 막상 엄마가 걱정하면 '취조한다'거나 '불안장애 환자'로 몰아붙입니다. 이는 자신을 향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양가감정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글쓴이 (아내이자 엄마): 자신도 화상 입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가족들의 고통에 먼저 반응하며 스스로의 치유를 뒷전으로 미뤄왔습니다. 오랫동안 딸의 '버림받은 마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믿으며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딸의 불안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남편의 상처가 투사된 것임을 깨닫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족의 아픔을 혼자 짊어지려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경계를 세우는 데 집중합니다.
이 글은 글쓴이가 딸의 행동과 자신의 감정적 고통을 오랫동안 파헤치고 고민한 끝에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하고 새로운 결심을 한 시점에서 쓰였습니다. 글의 내용은 단순히 일어난 사건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깊은 심리적 통찰을 보여줍니다.
오랜 내면의 탐구: 글쓴이는 자신의 '불안'과 '딸의 버림받은 마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수년간 탐구했습니다. 단순히 현재의 갈등을 넘어 과거의 상처와 그 상처가 어떻게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 해방의 순간: 글의 후반부, '딸의 버림받은 마음은 내게서 나온 게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언하는 부분은 오랜 죄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해방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글은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담고 있습니다.
경계 설정의 필요성: 글은 더 이상 가족의 아픔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을 돌보기'로 한 중요한 전환점을 기록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 관계에서 필수적인 건강한 경계 설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글쓴이가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