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한 번쯤 겪게 되는 혼선 중 하나가 '내가 예전에 왜 그랬을까. 왜 나를 더 아껴주지 못했을까, 왜 남의 말에 쉽게 흔들렸을까. 이제는 남보다 나를 더 생각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표현 다하고, 나를 더 이상 비참하게 두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을 하며 자신의 과거를 되려 부정해 버리는 순간을 맞는다.
먼저 인사하고 상냥하게 굴던 사람들도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 가면성 우울로 늘 남한테 먼저 인사했으니까 이제는 나도 일부러 먼저 인사하지 않을 거야.'라며 괜히 시니컬한 태도로 변하기도 한다. 직접 공격을 하면 그나마 귀엽기라도 한데 안 그런 척하면서 수동공격을 할 때면 주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 '모두 다 기분 나쁘게 만드는 전염병'을 퍼트리기도 한다.
내가 나와 더 친해진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행동을 다 뜯어고친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닮아 버린 모습은 그냥 그대로 반복해도 괜찮다. 유난히 고치고 싶은 모습만 조금 신경 써 주기만 하면 된다. 밥을 먹고 나서 밥값을 먼저 내는 것이 편한 사람은 그냥 가볍게 밥값 내면 된다. 누가 사주면 고맙게 먹으면 된다. 혼자 가는 것보다 누구라도 태워다 주는 것이 편한 사람은 태워 주면 된다. 바쁠 땐 볼일 있노라 밝히면 된다. 선톡을 하며 안부를 묻는 것이 편한 사람은 누군가 갑자기 생각나면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면 된다. 누군가에게서 선톡이 오면 반갑게 맞아주면 된다. 사람들마다 마주치면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이 편한 사람은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하면 되는 것이다.어쩌다 인사 못하고 지나쳐도 걸림이 없으면 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동안의 자기 모습에 과도하게 연민을 느끼다 못해 세상 사람들을 적으로 인식하면서 자기를 더욱 소외시키는 태도로 바뀌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책임자라서 요청하는 내용마저 '나를 무시하니까 이런 걸 시키는 거지!'라며 '그런 거 앞으로 저한테 부탁하지 마세요!'라며 거칠게 거절한다거나, 누구나 마중 나갈 수 있는 자리라서 나갈 뿐인데 '그런 자리 나가면 괜히 아부 떤다고 할 테니까 나는 이제 안나갈래!'라며 고립과 단절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럽게 스몰토크 정도는 해도 되는데 유난히 날을 세워 '무례하신 거 아니에요?'라며 반응을 한다거나, 선의의 인사마저도 의도가 숨은 것으로 오해하며 '나는 나를 보호해야 되니까!'라며 움츠리기도 한다.
자기 계발서를 통해, 여러 강연을 통해 자신을 더욱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어 주라는 말에 누구나 공감을 하면서도 자기를 세상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더욱 경계 지어 멀어지게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왜 불편한가를 고민하다 보니 어쩌면 한때의 내가 그런 모습으로 나를 보호하려 들었던게 아닌가 싶었다.
내 인사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나답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소셜 마스크로 친절한 인사를 건네면 된다. 일부러 누가 몇 번 인사를 거부했고,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마음에 담아 두며 각각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어쩌면 더 피로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내적인 세상이나 외적인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꽁 해지고 더 옹졸해지고 더욱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적 세상과 외부가 조화를 이루게 되면 자연스럽게 타인과도 어울리게 되고, 내가 속한 세상의 시스템에서 한때는 중심이 되었다가 한때는 일부가 되는 역할을 번갈아 가며 수행해도 가벼워지는 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아닐까.
자동적으로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버릇인 사람이, 아 괜히 또 굽신거리고 인사했네!라고 하는 것보다는 자존감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사 나누고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자기와 세상을 연결하는 행위라면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
내일의 나는 누구와도 반갑게 인사 나누고, 소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안녕에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그런 내일이 되길 바란다.